팬데믹 이전, 나는 중국 충칭(重慶)에서 근무하며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나는 가끔 주말이면 충칭의 옛 거리인 츠치쿠(磁器口)를 찾곤 했다. 그곳은 서울의 인사동처럼 전통 공예품점과 찻집, 간식가게들이 골목마다 오밀조밀 붙어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 냄새가 나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 현대식 빌딩 숲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던 내게 그곳은 잠시 마음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 거리 한편에는 한자를 그림처럼 그려주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늘 붓으로 그림 그리듯 글을 쓰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멋진 서예화로 만들어주는 분이었다. 어느 날, 나도 기념 삼아 내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했더니, 동행했던 조선족 직원이 “한국에서 일하는 큰 회사의 책임자이니 멋지게 써달라”라고 통역을 했다.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보더니 웃으며,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붓을 들었다. 그리고 내 이름 옆에 또렷하게 네 글자를 써 내려갔다.
“過猶不及(과유불급)”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이었다.
할아버지는 붓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당신이 큰 회사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 해도, 만족을 모르고 계속 욕심을 부리면 결국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소.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알고, 오래 즐겁게 살아가시오.” 그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큰 욕심을 멈추게 한 네 글자
그날 받은 ‘과유불급’은 내게 단순한 글귀 이상의 의미였다.
그 순간 나는 마치 누군가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좀 멈춰서 자신을 돌아보시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는 멈추지 않았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왔는지도 모른 채, 늘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쉼 없이 걸어왔다.
성공, 명예, 돈, 성취… 이런 단어들이 내 삶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충칭의 거리에서 만난 그 노인의 글씨는 나에게 물었다. “그 목표를 이루면서 정작 소중한 것들을 잃은 적은 없소?”
“목표를 모두 이루었다고 해서, 그게 진정한 당신 자신이오?”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오랫동안 나를 이끌어온 것은 열정이었지만, 그 열정 속에는 욕심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욕심은 늘 다음 목표를 향해 나를 몰아붙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나는 앞만 보고 달렸고, 어느새 삶의 주변 풍경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목표와 만족, 두 축의 인생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목표와 만족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목표지향적인 삶은 ‘무엇이 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현재를 희생하더라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동시에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더 나은 나’를 향한 욕망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때로는 삶을 메마르게도 만든다.
반면 만족지향적인 삶은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며, 일상의 작은 기쁨 속에서 행복을 찾는 삶이다.
비록 물질은 많지 않더라도 마음이 부유한 사람들. 종교인들이나 소박한 삶을 즐기는 이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매일의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자신의 신념과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현재의 삶 속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이런 삶은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의 것이다.
그러나 목표 없는 만족은 안일함을 낳고, 만족 없는 목표는 허무함을 낳는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삶은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 상태,
즉 ‘목표를 향해 나아가되, 적당한 지점에서 만족할 줄 아는 삶’ 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적당히’다.
젊을 땐 목표, 나이 들어선 만족
젊은 시절에는 목표지향적인 삶이 필요하다.
그 시기의 ‘가능성’은 무한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를 알아가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도전하는 시기, 그게 청춘의 특권인 것이다.
젊은 날부터 너무 일찍 안주해 버리면 자기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삶이 된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까지 세속적 목표에 매달린다면 그것은 욕심, 즉 ‘노욕’이다.
젊음은 가능성의 시간이라면, 노년은 수확과 성찰의 시간이다.
이제는 자신이 이룬 것들을 지키고,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작은 성취에도 감사하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것, 그것이 인생의 또 다른 지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만족을 배워야 할까?
그것은 나이가 아니라 ‘가능성의 시점’에 달려 있다고 생각을 한다.
더 나은 가능성을 시험해 볼 여지가 남았다면 계속 도전해야 하고, 자신의 길을 확인했다면 이제는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며 지켜야 한다.
젊을수록 목표에, 나이 들수록 만족에 집중하는 것이 인생의 균형이다.
인생의 시계가 알려주는 교훈
우리 세대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목표지향적으로 살아야 했다.
1960년대 초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 만족이라는 단어는 사치였다.
“공부해서 출세하라”, “더 노력해야 산다”는 말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기성세대는 아직도 크고 작건 늘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려 애쓴다.
반면, 지금의 젊은 세대는 사회의 안정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삶의 질’, ‘개인의 만족’을 더 중시한다.
어찌 보면 그들이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과유불급의 지혜
우리는 늘 ‘조금만 더’를 외치며 살았다.
조금만 더 벌면, 조금만 더 오르면, 조금만 더 가지면 행복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종종 공허가 기다린다.
달성의 기쁨은 잠시이고, 다시 새로운 목표가 나를 몰아붙인다.
이쯤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브레이크’다.
목표는 액셀러레이터, 만족은 브레이크다.
엑셀 없는 차는 움직이지 않지만, 브레이크 없는 차는 폭주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달릴 때는 달리되, 멈춰야 할 때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의 기준이 바로 ‘과유불급’이다.
멈춤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
이제 나는 그 충칭 거리의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한다.
그분은 단지 붓글씨를 쓴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방향을 써준 것이었다.
욕심이 지나치면 결국 스스로를 해친다.
만족을 아는 사람만이 오래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고, 새로운 목표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목표 위에 이제는 한 문장을 새기고 싶다. “과유불급,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인생의 속도를 조절하며, 내가 달려온 길 위에서 지금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달릴 땐 달리고, 멈출 땐 멈추어라.
그때 비로소, 인생의 참된 아름다움이 보인다.”
내가 지금에 와서야 배운 인생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