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동안 나는 ‘용서’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힘들게 일주일을 지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이번에 제대로 느꼈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을 오르내렸다.
형은 평소 건강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등산을 다녔고, 일상에서 참선을 하며 절제된 생활을 이어왔다. 욕심 없고 온순한 성품 그대로,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난봄부터 몸이 유난히 피곤하다며 몇 년간 해오던 개인택시 일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때만 해도 큰 병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가 이미 건강에 적신호가 온 것이었다.
형은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까지 2대 외동으로 내려온 손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육 남매의 장남이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특히 할머니와 다섯 고모들의 형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은 남달랐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맏아들이자 2대 독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형은 부족함 없이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 환경 때문이었을까. 형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지나치게 온순했고, 절박함이 부족했다. 욕심이 없고 착하기만 한 심성은 미덕이었지만,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는 약점이 되기도 했다. 삶이 힘들어질수록 간절함으로 버텨야 할 순간에도 형은 늘 어려움 앞에서 무너지곤 했다.
둘째인 나와 형은 모든 면에서 많이 달랐다.
나는 형과는 반대 성격이었고, 형은 그저 “좋은 사람”으로 살았다. 사람만 좋다 보니 세상살이에서는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 착함이 결국 형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은 늘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미어졌다.
형의 결혼 후 삶도 녹록지 않았다. 대식구 가난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온 형수는 훤칠한 인물의 남편을 보고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곧 현실이 되었다. 형수는 성격이 강했고, 형은 늘 참고 양보하는 쪽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다 보니 부부싸움도 잦아졌고, 부모님 생전에도 가족들은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신 뒤, 형과 형수의 사이는 더 나빠졌다. 서로를 지탱해 주던 어른의 울타리가 사라지자 갈등은 고스란히 두 사람 몫이 되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형의 경제력이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남편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때 가정의 화목은 유지되지만, 경제가 흔들리면 가정의 평안은 쉽게 무너진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 한다. 그중에서도 경제적 스트레스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갉아먹는다. 건강했던 형도 몇 차례의 사업 실패와 생활고 속에서 조금씩 건강이 무너져 갔다. 그때부터 건강은 나빠졌고, 부부간의 불화는 잦아졌다. 결국 올해 봄, 건강검진에서 ‘초기 간경화’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즉시 치료를 권했다. 형편이 어려운 형을 위해 내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이라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파트도 마련해 주었고 수년 전에는 개인택시도 사주었고, 건강을 위해 쉬어야겠다고 얘기한 이후에는 처분하도록 도왔다. 추석 무렵에도 치료비에 보태 쓰라며 도움을 주었다. 개인택시 처분 비용 역시 형의 손에 그대로 쥐여주었다. 그 돈에는 나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제발 치료부터 하라”는 동생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형은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았다.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판단해 민간요법을 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형수를 통해 들었다. 불과 두 달 전, 가족들과 함께 추석 명절 제사를 지냈던 형이 지난주 갑작스러운 급성 패혈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도 원망이 앞서고 고통스러웠다. 형의 조카들과 형제들은 분노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치료를 하지 않고 병을 방치할 수 있느냐고, 사람의 목숨보다 돈을 지키려 한 것이 아니냐고 분노했다. 장례 기간 내내 그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미국 시애틀에서 하룻만에 날아온 큰 여동생은 울며 말했다. “이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라고.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었다.
형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지금 와서 책임을 따져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형제들에게 단단히 말했다. 더 이상 이 문제를 꺼내지 말자고. 유가족의 몫인 고통을 형제들이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고.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남은 사람이라도 분노 속에서 정신 건강을 해치지 말아야 했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형과 함께 자라온 기억, 평생 고생만 하다 간 형의 삶, 동생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줬다고 믿었던 내 마음이 억장이 무너지듯 무거웠다. 형은 자신의 몸보다 가족의 생활을 먼저 챙기다 결국 병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떠났다. 그 현실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의 무기력함에 자책을 했다.
그때 나는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은 계속해서 미움과 분노를 붙잡고 있게 되고, 훗날 그 마음은 스스로에게 또 다른 큰 짐이 되는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속 ‘파코’ 이야기가 떠올랐다.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중 스페인 마드리드를 배경으로 한 "세계의 수도" 에는 ‘파코’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어느 스페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한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신문에 광고를 낸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나는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다.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원하고, 용서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용서’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평생 지켜야 할 한 가지를 묻는 제자에게 “서(恕), 곧 용서”라고 답했고, 법정 스님은 “인생의 종점에서 용서 못할 일은 없다”라고 했다.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또한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상대를 향한 감정 같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묶는 족쇄다. 용서는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족쇄에서 나를 풀어주는 행위다.
사람은 마음속에 담아 둔 사람을 닮아 간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기도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 또한 닮아 간다. 미움은 생각보다 강하게 마음을 지배한다. 그래서 미운 사람을 마음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용서라는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용서는 쉽지 않다. 억지로 잊는 것도 아니고,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왔고, 수많은 용서를 받으며 여기까지 왔다. 용서하는 사람은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며, 스트레스가 적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분노는 나를 병들게 하지만, 용서는 나를 살린다. 용서를 선택하는 삶은 상대방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길이다.
옛날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 초나라의 장왕이 커다란 잔치를 베풀고 장수들을 초대했다. 술자리가 무르익던 중 세찬 바람이 불어 불이 꺼졌고, 그 틈에 장웅이라는 젊은 장군이 술김에 왕의 애첩을 껴안는 큰 죄를 범했다. 애첩은 그의 투구에서 금술을 떼어냈다. 그러나 왕은 불을 다시 켜지 말고 모든 장수에게 투구의 금술을 떼어 바치게 했다. 결국 범인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 후 전쟁이 벌어졌을 때, 장왕을 끝까지 지켜 목숨을 걸고 싸운 장수는 바로 그 장웅이었다. 자신을 용서해 준 왕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생명을 다해 싸운 것이다.
어떻게 미운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는가?”라고 묻자, 예수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고 말했다. 용서는 억지로 잊으려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용서는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이 미운 사람을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서 몰아내는 길이다.
“정말로 사랑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테레사 수녀 -
정말로 용서하는 법을 배우려면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첫째, 당신에게 일부러 상처 주려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당신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기심이나 생각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상처 주기 위해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둘째, 화가 나면 숨을 깊게 쉬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라. 상처를 받아 화가 나면 숨을 몇 번 깊게 쉬고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숨을 깊게 쉬면 이완이 된다. 숨을 두세 번 깊게 쉬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여기에 따뜻함을 느낄 것이다. 다음번에 화가 날 때마다 이런 것을 대여섯 번 정도 계속 연습한다면, 몸이 이완되고 괴로움이 가실 것이다.
셋째,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은 그들에게 달려있는 것이고요. 당신에게는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있다.
좀 더 관대해지고, 인내하고 용서하면 그것이 습관이 된다. 부정적인 말로 나쁜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우리는 자신의 언행을 조절할 수 있다.
용서하는 사람이 신체적으로 더 건강하고 정서적으로 더 행복하며 인생에 더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힘이다.
나는 이제 조금씩 깨닫고 있다.
형을 떠나보낸 이 슬픔 속에서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은 끝없는 원망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한 용서라는 것을. 형의 삶은 힘들었고, 세상은 형에게 늘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삶을 분노로 기억하기보다 연민과 이해로 품고 싶다.
사랑하며 살아도 너무 짧은 인생이다.
더 미워하지 않기 위해, 더 아프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부터 용서를 연습해야겠다.
용서는 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은 나를 위한 선택이다.
형을 떠나보낸 후 내가 다시 숨을 고르고 살아가기 위한 용서는 나를 위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