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여 전, 연말을 앞두고 미국에서 여동생의 아들이 서울에 들렀다.
조카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여덟 살이 되던 해 여동생 가족은 큰 결단을 내렸다.
아이들을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으로, 가족 모두가 한국으로 귀국했다. 1997년의 일이었다.
매제는 미국 포틀랜드 주정부 전력회사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정체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귀국을 결심한 뒤, 나는 서울에서 매제가 근무할 회사를 알아보기 위해 이력서를 준비했고, 삼성물산·삼성엔지니어링·포항제철·대림산업 네 곳과 인터뷰 자리를 만들었다.
미국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주정부 전력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한 경력은 한국 기업들에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결국 매제는 포항제철을 선택했고, 차장 직급으로 본사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직장의 수직적인 문화와 조직 분위기는 쉽지 않은 벽이었다. IMF 시기를 겪으며 매제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여동생 가족은 또 한 번의 이주 아닌 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5년, 여동생네 가족은 현재 미국 오리건주에 살고 있다.
어리던 조카는 어느새 번역작가가 되었다
내 기억 속 조카는 늘 어리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에 온 조카는 어느덧 서른 중반의 나이가 되었고, 자신만의 일을 하고 있었다.
조카는 한국과 미국의 언어와 문화를 모두 몸으로 익히고 겪은 교포 2세다. 한국어에도 능숙하고, 미국 문화에도 깊이 익숙하다. 그는 미국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시애틀의 워싱턴대학교(UW)에서 컴퓨터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2년 만에 중퇴했다.
대학을 그만둔 뒤 조카가 선택한 길은 뜻밖에도 ‘번역작가’이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미국에서 번역 출판 회사를 창업했고, 지난 10년 동안 한국 판타지 소설과 에세이를 영어로 번역해 출판해오고 있었다. 아마존을 통해 번역한 한국의 판타지 소설책을 판매하며, 한국 작가의 작품을 미국 시장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여동생에게 “조카가 대학을 그만두고 번역 일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일이 무엇인지 깊이 알지는 못했다. 이번에 조카가 서울에 와서 직접 사업 구조와 번역·출판 과정을 설명해 주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일이 어떤 세계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과 미국의 경계에서 만들어낸 일
조카의 사업은 단순하지 않았다.
한국 작가를 직접 찾아 계약을 맺고, 원작의 저작권을 미국 정부에 등록한 뒤, 영문 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번역된 원고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독자 반응을 살피고, 일정 독자층이 형성되면 본격적인 단행본 출판으로 이어진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평균 3,000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번역과 교정, 퇴고 과정을 다섯 번 이상 반복하며, 번역 오류와 문화적 어색함을 하나하나 다듬는다. 이 과정은 조카 혼자서 맡는다.
과거에는 한국인과 미국인을 고용해 함께 작업해보기도 했지만, 언어와 문화의 미묘한 차이를 동시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결국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완성된 책은 아마존을 통해 세 가지 형태로 판매된다.
유료책 읽는 사이트(Kindle Unlimited), 전자책(e-book), 종이책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별도의 계약과 형식으로 관리된다.
이후 오디오북까지 제작이 끝나면, 인도에 있는 마케팅 파트너가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홍보와 판매 전략을 담당한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번역은 미국 포틀랜드에서, 편집과 디자인 아이디어는 미국 동부 보스턴에서, 마케팅과 계약 관리는 인도에서 이루어진다니, 과연 이런 방식이 가능할까 싶었다. 그러나 조카는 이미 수년간 문제없이 이 구조로 사업을 운영해 왔다고 했다.
인도의 20대 중반 파트너는 아마존과 한국 판타지 소설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작가 발굴부터 마케팅까지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그 파트너는 아직 미국이나 한국에 와본 적도 없다고 했다.
번역작가, 언어를 넘는 사람
조카의 이야기를 들으며 ‘번역작가란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번역작가는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사람이 아니다. 원문의 의미와 감정을 살리고, 문화적 맥락을 이해한 뒤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문학 번역에서는 작가의 호흡과 정서를 지키면서도, 다른 언어권 독자에게 새롭게 살아 숨 쉬게 해야 한다.
AI 번역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이지만, 문학과 콘텐츠 영역에서는 여전히 인간 번역가의 역할이 크다.
AI는 속도와 효율에서 강점이 있지만, 문화적 뉘앙스와 감정의 결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앞으로 번역작가는 AI와 협력하며 후편집과 재창조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문가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색을 가진 미국인으로서의 조카는 한류와 k 콘텐츠를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고자 이번에 서울을 오게 된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한류는 이제 전 세계를 사로잡는 거대한 K콘텐츠를 통한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카가 생각하고 느끼는 지금의 한류는 K-POP을 넘어 드라마·예능·애니·게임·출판 등으로 확장되며 미국에서의 소비 수요가 커지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한류 K-POP, 드라마 등 한국 콘텐츠 소비와 수요가 점차 늘고 있으며 K예능이 미국에서 글로벌화 가능성이 크고, 방송영상 IP를 활용한 푸드·패션·문학 등 산업 연계 비즈니스 기회가 확대되고 있다고 조카는 설명을 하였다.
몇 해 전 미국 LA에서 K-콘텐츠 엑스포가 개최된 적이 있어서 조카는 그곳에서 한류는 K-POP 넘어 한류 콘텐츠 다변화에 미국인들의 관심과 미국에서의 K-콘텐츠 방송, 애니, 캐릭터, 게임, 만화, 판타지 소설 등을 통해 한국 출판물이 미국 시장에서의 경쟁력과 K-Book을 통한 사업기회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앞으로의 미국에서의 번역작가 일자리와 수요는 한류와 K 콘텐츠와 글로벌 문화교류 증가로 인한 번역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앞으로 번역작가의 경쟁력은 언어 능력뿐 아니라 문화의 이해, 전문 분야 지식과 AI·디지털 도구 활용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시대에는 번역작가도 AI 활용 역량을 포함한 융합형 번역 교육과 전문 인재 양성이 필요할 것이다.
재작년, 한강 작가가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그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영국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주목받았다.
그가 없었다면 한강의 작품이 세계에 알려지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번역작가는 원문 작가와 세계를 잇는 다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사례였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듯이 조카의 한국 판타지 소설 번역본은 아마존 e-book 판매 순위 톱 5 안에 오르기도 한다.
책 한 권당 연간 매출은 약 5만 달러, 연간 세 권을 출간하면 15만 달러 이상의 매출이 발생한다. 로열티와 재투자를 제외하면 큰 수익은 아니지만,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무심코 흘려보냈던 조카의 일이, 이번 서울 방문을 통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한국과 미국, 언어와 문화의 경계에서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앞날을 보고 번역작가의 일을 해내고 있는 출판일은 조카의 새로운 분야의 사업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오래전 대기업 화장의 말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닿았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의 시대 속에서, 조카는 번역이라는 오래된 직업을 가장 현대적인 기술과 접목하는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삼촌의 글도 언젠가 아마존에 올리겠다는 조카의 말을 듣고 웃으며 나 역시 새로운 세계를 배우는 마음으로 새해 몇 주를 보냈다.
글로벌 시대에 그 경계에 서서 다리를 놓는 사람이 번역 작가다.
빠르게 변모하는 AI 기술과 함께하는 번역작가란, 무한 경쟁 시대 속에서 비전 있고 미래전망 좋은 직업을 찾고 있다면? 프리랜서처럼 편하게 일하면서 안정적인 수입을 구축할 수 있는 프리랜서 번역작가의 영역도 있다.
바로 조카가 생각하고 열어가는 번역작가도 새로운 일거리라고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