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배운, 가족관계에서 '척' 세 가지

by 김성훈


우리 집에는 토요일에는 손주 둘이 오는 날로 정해져 있다. 달력에 적히지 않은, 그러나 누구보다 정확하게 지켜져 온 날이다.

손주 둘이 두 살이 되던 해부터, 매주 토요일이면 우리 부부와 하루를 함께 보냈다. 어느새 그 시간이 8년이 흘러, 올해 손주들은 열 살,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집 가까이에 살다 보니, 손자는 큰아들네에서, 손녀는 둘째 아들네에서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우리 집으로 온다. 아이들에게 토요일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는 날”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기저귀를 차고 기어 다니던 아이들이었다.

뽀로로 영상을 보고 웃고, 손자는 공룡 장난감을 손녀는 백설공주 인형을 끌어안고 놀던 시절이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아이들의 키는 쑥쑥 자랐고, 그때마다 옷과 신발을 사 입히는 소소한 기쁨도 따라왔다. 커가는 발에 맞춰 신발을 신겨보는 재미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즐거움이었다.


아들 내외들은 토요일만큼은 전적으로 우리 부부에게 아이들을 맡겼다.

아침에 데려다주고, 밤에 데려갈 때까지 간섭도, 의견도 없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놀이공원도 가고, 과천과학관도 가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수없이 다녔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늘 분주했지만, 그만큼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다.


지난주에도 손주들이 왔지만, 나는 지방에서 온 옛 직장동료들과의 모임으로 하루 종일 외출을 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이제 정말 ‘학생’ 티가 났다. 할머니와 함께 점심에는 서점에 들렀다 외식을 하고, 저녁에는 할머니가 해준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날 밤 두 아들 내외가 아이들을 데려간 뒤, 아내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까지 손주들이 토요일마다 올까?”

아내는 예전에 말했다. 다섯 살, 여섯 살 때까지만 오겠지, 초등학교 들어가고 2학년쯤 되면 자연스레 끊어질 거라고. 그런데 이제 3학년이 되었는데도, 손주들은 여전히 토요일이면 당연하다는 듯 우리 집으로 온다.



우리는 나이 들어가고, 손주들은 커간다.

곧 사춘기가 오고, 청소년이 될 것이다. 언제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품 안에서 주말을 보내게 될까. 언제까지 옷을 사 입히고, 발에 맞춰 신발을 사 신기며, 서점과 과학관을 함께 다닐 수 있을까. 금요일이 되면 “내일 손주들 오는 날이네” 하며 집을 치우고,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 끝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직 아들 들네와 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우리가 건강하고, 아이들과 외출도 잘 다니고, 손주들도 아침에 올 때는 반갑고, 밤에 갈 때는 다음 주를 기다리며 돌아간다. 가까이 사는 자녀 가족이 오면 즐겁고 기쁜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언제쯤 자기들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부모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지만, 부모에게도 사정이 있다.

몸이 지치고 마음이 힘든 날, 자식들이 오는 날은 반가움과 함께 부담이 된다. 집안 청소도 해야 하고, 반찬도 준비해야 한다. 아무리 싹싹하고 예쁜 며느리라도 손님은 손님이다. 자주 보고 자주 오게 될수록, 서로의 선을 존중해야 오래 편하다.


부모는 자식을 품어야 하지만, 오래도록 마음을 내어주다 보면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한 주라도 손주들을 못 봐주면 어색해지고, 한 번 덜 챙기면 서운함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했다. 이제부터는 손주들이 와도, 함께 시간을 보내되 내 몸을 살피자고. 무리하지 말자고.

손주들이 오면 반갑고 귀엽다.

하루 종일 시끌벅적 뛰놀다 돌아가고 나면, 집안일과 뒷정리는 우리 몫이다. 그러니 기운 닿는 데까지만 하자. 자식들과 손주들도 함께 치울 건 치우게 하자. 웃으면서 알려주자.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서로 도우며 사는 게 더 편하다. 그렇게 하기로 아내와 마음을 모았다.


가까이 살며 자주 만나는 부모가 자식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작은 일에도 크게 감사하는 것. 부모 자식 간에도 당연한 것은 없다. 감사의 표현은 가족의 분위기를 바꾼다.

힘들어도 밝은 모습을 보이는 것. 하소연보다는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자.

자식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관심을 보이고, 말하기보다 듣는 것을 먼저 하자.

진짜 배려는 상대가 말하게 하는 것이다.



결혼한 자녀들과의 거리 두기는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서로의 독립을 돕기 위해 필요하다.

과도한 개입은 오히려 불화를 키운다. 애정과 관계 문제는 부부가 스스로 해결하도록 두는 것이 맞다. 금전적 도움은 가능해도, 급여 관리나 다툼 개입은 피해야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거리 조절은 더 신중해야 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것,

캐묻지 않는 것,

듣고도 못 들은 척 화제를 바꾸는 것.

그것이 부모의 용기이고 품격이다.

자식들의 체면을 지켜주는 부모가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든다.


부모의 마음은 복잡하다.

끝없는 사랑과 걱정, 기대와 실망이 함께한다.

자식이 커갈수록 사랑은 ‘보호’에서 ‘신뢰’로 바뀌어야 한다. 말보다 먼저 듣고, 조급함보다 기다리는 것이 자식의 성장을 돕는다.


이제는 나를 돌보는 순서대로 살기로 했다.

복잡한 머리는 비우고, 허한 속은 채우고, 밀린 잠은 푹 자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은 흘려보내기로 했다. 부모는 자식을 소유하지 않는다. 자식은 빌려온 생명이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완성해야 한다.

자식은 사랑의 대상이지, 희생의 이유는 아니다.

잡지 말고 놓아주자. 자식의 날개는 스스로 펴야 한다.

내가 잘 사는 것이 자식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이다.


지난주에는 미국에 살고 있는 여동생 부부가 서울에 들렀다.

올봄 매제가 은퇴를 앞두고, 3월부터 약 5년간 한국에서 지낼 계획을 세우면서 미리 집을 보러 온 것이다.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었던 방배동 아파트의 세입자를 내보내고, 새로 인테리어도 알아보고, 미국에서 돌아와 바로 지낼 수 있도록 하나하나 점검하는 일정이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자식들 이야기가 나왔다. 여동생네는 1남 2녀. 큰딸과 막내딸은 미국에서 각각 치과대학과 약대를 나와 지금은 시애틀에서 치과의사로, 포틀랜드 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들은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번역작가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세 자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부모의 마음은 어디에 있든 같았다.

여동생은 웃으며 말했다.

“미국에서 아이들 키우고 사회에 진출시켰어도, 한국 부모 심성은 그대로야.”

반찬을 만들어 냉장고에 채워 넣고, 자식들 일이라면 뭐든 돕고, 쉽게 놓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과의 관계는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는 숙제 같다고,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자식은 놓아주면 한 발 다가오는 관계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내 자식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에게 걱정은 끝이 없고, 기대할수록 실망도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럼에도 오히려 부모의 바람은 단 하나다.

“행복하게만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고생하고, 속을 썩이고,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해도 결국 남는 마음은 그것뿐이다. 잘 되길 바라고, 덜 아프길 바라고, 조금이라도 덜 힘들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부모의 운명 같은 사랑이다.



그날 여동생 부부와 나눈 대화는 특별한 결론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식은 품에 안고 있을수록 멀어지고,

한 발 물러설 때 오히려 다시 다가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사랑이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믿고 기다리는 쪽에 더 가깝다는 것도.

부모는 끝까지 걱정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걱정이 자식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놓아주는 용기, 간섭하지 않는 사랑, 묻지 않아도 기다려주는 마음. 그것이 자식과 오래 편안하게 이어지는 관계의 비밀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연습을 해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 토요일에 매주 오는 손주들과 지내는 시간도 언젠가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어 끝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에 쌓인 온기와 기억은, 아이들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 남아 성장하고 살아가는 힘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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