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에 썼던 '인생 시나리오'

by 김성훈



“나랑 결혼하면,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우리 이름이 들어간 20층 건물을 지어줄게.”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였고 무모한 약속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군 입대를 앞둔 스무 살 청년의 몸뚱이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1979년 봄, 나는 입대를 앞두고 그 말을 진심으로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눈에 보이는 투시도 그림으로 그렸다. 내가 직접 그린 20층 건물의 투시도를 패널로 만들어 입대 전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에게 선물로 건넸다.

그 20층 투시도 그림은 오랫동안 아내가 간직해 왔고, 지금도 우리 집 창고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건물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투시도를 그려 주면서 약속했다 나랑 결혼하면 건물을 지어 주겠다고.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며 졸업 작품전을 준비하던 시절, 여자친구에게 보여주겠다며 두 채의 건물 투시도를 함께 그렸다. 그해 졸업 작품으로는 대학 도서관 계획안을 출품해 특상을 수상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며 미래를 그리고 있었고, 그 미래 속에는 언제나 지금의 아내인 여자 친구가 있었다.


다른 배경, 같은 마음으로

아내와 나는 고등학교 입학하고 불교학생회에서 처음 만났다. 2년간의 동아리 활동을 통해 가까워졌고, 대학 시절에도 인연은 이어졌다. 나는 평범한 공무원 가정의 둘째 아들이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 형과 할머니와 한 방을 쓰던 시절, 나만의 공부방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겨우 형과 함께 쓰는 작은 방을 얻었다.

반면 아내의 집은 섬유공장을 운영하던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 남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경제적 환경은 우리 집과는 많이 달랐지만, 아내는 우리 집의 북적이는 대가족 분위기를 좋아했다. 할머니는 아내를 유난히 예뻐하셨고, 아내도 자주 우리 집에 들러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내가 군에 입대한 뒤, 아내 집안은 사업 부도로 공장 문을 닫고 대구에서 서울로 옮겨와 오류동 근처에서 규모가 작은 섬유공장을 새로이 시작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변화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아내는 내가 건네준 20층 건물 투시도를 간직하고 있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결혼을 하고 신혼 시절에, 단칸 셋방 벽에 그 투시도 그림을 걸어두고 살던 때도 있었다. 그 투시도 그림은 단순한 액자가 아니라, 우리 부부의 미래를 상징하는 약속이었다.


열 달에 50만 원, 사글셋방에서 시작한 결혼생활

결혼 후 우리의 출발은 작고 초라했다. 그 시절 결혼은 요즘 같이 부모로부터 아파트를 받거나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열 달에 50만 원, 한 달 5만 원짜리 단칸 사글셋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큰아들이 태어나 조금 더 큰 셋방으로 옮겼지만, 휴일 내가 방에 누워 있으면 아이가 기어 다닐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광양제철소에 다닐 때 둘째가 태어날 무렵, 15평 주공 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태어나서 주택에서만 살던 내가 3층 아파트에서 첫날밤을 맞았을 때, 공중에 떠 있는 느낌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30대 초반, 15평 아파트를 내 명의로 등기하던 날에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후 근무지를 따라 이사를 하여 수도권의 광명시에 33평 아파트에 입주하던 날, 부모님과 장모님까지 올라와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 15평에서 33평으로 옮긴 그 넓은 공간에서 아내는 주방에서 거실까지 걸음 수를 세어보며 행복해했다.

부모님께서도 "새집에서 첫날밤을 부모님이 주무시면 앞으로 좋은 일이 많다"는 말씀에 기꺼이 머무르셨다.


그렇게 시작한 수도권에서의 생활 한지도 벌써 32년이 흘렀다. 결혼 후 16번의 이사를 거쳐, 나는 결국 아내와 약속했던 건물을 지었다.

서초동과 이태원에, 나와 아내의 영문 이니셜을 넣은 두 채의 건물. 40년 전, 말도 안 되는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스무 살 인생 시나리오를 쓰다

돌이켜보면, 스무 살 즈음에 그린 20층 투시도가 나의 인생 시나리오였다.

무의식 속에 입력된 ‘건물주의 삶’이라는 그림.

나는 그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군대에 다녀와서 80년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쉼 없이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았다.

30대 초반, 전문 자격증을 목표로 책상 앞에 “반드시 합격한다”는 문구를 붙여두고 주경야독했다.

주말에는 아파트 뒤 야산에 올라 꼭 합격을 하겠다고 외치고 내려오기도 했다. 결국 합격을 했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인생의 목표를 구체화하고, 행동 계획을 세우고, 정기적으로 점검했었다. 그것이 내가 믿는 인생 시나리오 작성법이다.



성공은 우연히 오지 않는다.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장기 비전을 세우고,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단계별로 실행하며, 끊임없이 점검하는 과정을 지나야 천천히 성공의 결과를 만날 수 있다.

미래를 생각하며 나만의 각오를 일기로 쓰듯, 성공한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며 현재의 나에게 감정과 상황을 편지처럼 적고 수시로 읽으며 동기부여를 통해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생생히 상상하며 살아야 한다.

인생은 결과는 거북이걸음 같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다.


은퇴 후를 준비하는 네 가지

나는 60세 이후의 삶은 인생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건강, 배우자와의 관계, 경제력, 취미. 이 네 가지는 젊을 때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삶의 질을 결정짓는 가장 큰 기반이다. 평소 규칙적인 운동·영양·정기검진·스트레스 관리를 정기적으로 해야 한다. 나이 들어 몸에 적신호가 켜지고 건강에 이상이 오면 그때는 이미 늦다.

아내와 함께 은퇴 후를 잘 지내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 아내를 배려하고 ‘금슬 좋은 부부’로서, 감사·소통을 해야 한다. 나이 들면 배우자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서로를 돌보는 간병인과 같다. 아내와의 관계는 나이 들어 갑자기 좋아지기는 힘들기 때문에 평소 아내의 삶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경제력은 노후의 자존심이자 삶의 중심이다. 인생의 어려움 중에 가장 큰 어려움은 돈과 관련되어 있다. 인생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은 노년의 빈곤이다. 연금·저축· 재테크 등 재정적 준비를 하여 노후에도 현금이 들어오는 자산준비를 해놓아야 한다.

은퇴 후 취미나 소일거리가 있어야 한다.

등산이나 바둑 골프 등 같이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취미는 신체·정신 건강을 돕고 성취감과 만족감을 높여준다 독서·산책·봉사· 새로운 학습과 같이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가 있으면 가장 좋다.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아내가 고맙게 느껴진 적이 없다.

회사에 다닐 때 국내외 현장을 오가며 집을 비운 세월 동안, 아내는 묵묵히 가정을 지켰다. 두 아들을 반듯하게 잘 키웠고, 지금은 가까이 살면서 두 며느리와 손주들이 오가는 평온한 노년을 함께 누리고 있다.

나는 돈을 벌었다는 이유로 집안일을 많이 돕지 못한 가장이었다.

옛말에 “집안은 들어오는 사람이 잘 들어와야 흥한다”라고 했다. 우리 집의 복덩이는 아내라고 생각을 한다.


생각은 현실을 만든다

두 갈래 단발머리의 여고생이던 여자친구. 스무 살 가진 것이라곤 없던 건축학도가 내민 20층 건물 투시도를 받아 들고 조용히 웃던 모습. 그날 나에게 보내던 웃음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생각은 감정을 바꾸고, 감정은 행동을 바꾸며, 행동은 결국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인생의 큰 성과는 한 번에 오지 않는다.

작은 노력의 누적이 결국 꿈의 모습을 완성한다.

열 달에 50만 원 사글셋방에서 시작한 신혼부부가, 40년 후 서초동과 이태원에 자신들의 이름을 단 건물을 세웠다. 그것은 돈의 이야기가 아니라, 약속의 이야기다. 그리고 인생 시나리오를 끝까지 실행한 한 나와 아내의 이야기다.


나는 이제 서초동에서 은퇴자의 삶을 살고 있다.

젊은 날, 꿈의 크기는 조금은 무모해도 좋다. 그리고 그 무모한 꿈을 종이에 적고 날마다 성공의 꿈을 그리고, 마음에 새기고, 행동으로 옮기면 그 생각은 현실을 만든다.



꿈을 향해 날마다 실행하면 꿈은 현실이 되고 그러면 언젠가, 당신도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인생 시나리오 대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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