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차 베이비부머 세대다. 산업화 시대를 거쳐온 우리 세대는 가정 내 역할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어릴 적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선명하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
그 말을 배우고 믿으며 자랐다. 아버지가 그랬고, 그 시절 사회분위기가 그랬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보고 배운 대로 나도 그렇게 살았다. 직장에 나가 돈을 버는 것이 가장의 몫이었고, 집안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래서 경계는 분명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닥치고, 중국에서 하던 사업을 접고 16년 만에 귀국했다. 그리고 완전히 낯선 시간이 시작되었다.
은퇴자의 삶, 그리고 낯선 일상을 만났다.
예상치 못한 갈등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귀국 후 첫 6개월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해외에서 지내던 사람이 집에만 있으니 자존감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우울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평생직장과 가정으로 떨어져 지내던 부부가 온종일 한집에 같이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삼식이'가 되어 하루 세끼 밥을 달라고 했다. 평소에는 미처 몰랐다. 아내가 매일 아침 일어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또 점심 준비를 하고... 이 모든 일이 얼마나 힘들고 번거로운 일인지를.
아내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변의 조언대로 "퇴직하면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며 나서서 설거지를 했다. 그런데 핀잔을 들었다.
"그렇게 설거지하면 그릇이 깨끗하질 않아요. 그냥 내가 할게."
처음에는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평생 가족을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잔소리가 나왔고, 갈등은 깊어졌다.
가장 큰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끼니'조차 스스로 챙길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백기를 들고 말았다
갈등의 시간이 몇 달째 이어지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다. 내가 변해야 한다.'
나는 백기를 들었다. 더 이상 아내의 눈치를 보거나 내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내가 뭘 하면 좋을까? 어떤 게 편할까?"
그 질문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변화를 만든 작은 실천들,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기로 했다.
우리 집에는 서재 방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하고 시간을 보낸다. 아내는 우리 건물 1층에 있는 커피전문점을 관리하며 자신의 일을 한다.
우연히 집에 있는 시간이 겹쳐도 우리는 각자의 공간을 존중한다. 굳이 함께 있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식사 시간에 만나면 할 이야기가 생긴다.
식사 시간과 끼니의 자유를 얻었다.
나는 이제 스스로 끼니를 챙긴다. 아내가 집에 없을 때는 당연히 내가 해결한다. 밥을 짓고, 간단한 국도 끓인다. 남이 먹은 밥그릇을 치우는 건 자식이라도 화가 난다는 게 내 지론이라, 설거지 그릇은 절대 남기지 않는다.
아내가 점심을 차리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 주로 집 근처 맛집을 찾거나 배달 음식으로 함께 점심을 먹는다. 아내의 부담을 덜어주니 둘 다 편해졌다.
운동과 취미의 공유와 분리를 하였다.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주 3일은 헬스장에서 세 시간씩 시간을 보낸다. 아내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티브이를 보는 걸 좋아한다. 생활 패턴이 다르기에 굳이 같이하자고 권유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는 아내와 함께 우면산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 부부가 가장 쉽게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생각에서다. 가까운 곳에 사는 옛 직장 선배 부부와 넷이서 점심도 먹고, 근교 카페도 다닌다.
나도 심심하지 않고, 아내도 여자들과 어울려 즐거워한다.
얼마 전에는 부부 동반으로 중국 충칭 여행을 다녀왔다. 해외여행을 함께 다닌다는 건 정말 사이좋은 부부나 가능한 일인데, 우리도 그렇게 되었다.
내 일상과 아내의 멘토링을 받아 드렸다.
지금은 아내가 내 인생의 조언자다. 조급할 때마다 차분하게 길을 잡아주는 아내의 말이 큰 힘이 된다. 아내의 멘토링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아내의 얘기를 듣기까지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관계의 기술, 공존과 공감의 시간
작년 가을,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한 친구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 아내 자랑이었다.
우리 세대는 원래 처자식 자랑을 하지 않는다. '처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은퇴 후 집에서 지내면서 알게 된 아내의 헌신과 사랑을 있는 그대로 자랑했다. 평소 외출할 때 옷 입는 것부터 하루 세끼를 정성스럽게 차려주는 아내의 모습까지.
그 모습이 부러웠던 다른 친구가 말했다.
"지금 우리 세대에 그렇게 대우받는 남편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모두 박수를 을 쳤다. 그 친구를 축하하며, 동시에 우리 세대의 놀라운 변화를 실감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부의 인연
불교에서는 부부의 인연을 '인(因)과 연(緣)'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옷깃만 스치는 인연이 500겁이라면, 부부의 인연은 7,000겁이라는 깊이가 더해진다고 한다.
돌아보면, 아내는 평생 나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나도 이제는 아내를 더 돌보고 보살펴야 한다. 서로 아껴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안다.
함께 살아가는 법, 7가지 원칙
은퇴 후 5년간 배운 관계의 기술을 일곱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존중하기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을 고유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마음이 열린다. 어린아이조차 자신을 존중하는지 직감한다. 하물며 성인은 어떻겠는가.
둘째, 입장 바꿔 생각하기
내 마음을 전하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먼저 생각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과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을 일치시킬 수 있다.
셋째, 꾸준한 관심 가지기
일회성 관심은 무관심보다 더 서글프다. 잠깐 신경 쓰다 이내 무심한 것은 더 날카로운 상처를 남긴다.
넷째, '그 사람' 자체에 감사하기
무엇을 주었거나 무엇이 되어줘서가 아니라, 그냥 내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내 인생이 얼마나 풍부해졌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체에 감사한다.
다섯째, 관찰하고 경청하기
보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좋아할 수 있고, 좋아하는 만큼 배려할 수 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이야기를 경청한다.
여섯째, 나 자신부터 치유하기
상처받아 아프면서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배려할 수 없다. 행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을 전할 수 있다.
일곱째, 격려하기
좋은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힘들고 지쳤을 때, 실패하고 좌절했을 때, 다치고 병들었을 때, 초조하고 불안할 때, 격려가 난관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다. 누군가 어려울 때 내민 격려는 가슴 깊이 박혀 그 사람이 당신을 잊지 않게 된다.
의미 있는 노후를 위한 준비, 나는 인생을 길게 보면 세 번의 30년으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30년은 배우는 시간이다. 학교에서 교육받고 사회에 나올 준비를 한다. 그다음 30년은 사회에서 경제활동하며 치열하게 일하는 시기다. 그리고 60세 이후의 30년은 노후를 살아가는 시간이다.
문제는 이 세 번째 30년이다.
통계에 따르면 60세가 되었을 때, 약 1%만이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고, 4% 정도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한 상태라고 한다. 일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상당수는 생계를 위해 계속 일해야 하며, 또 다른 상당수는 돈도 일도 없는 빈곤한 노년을 맞이한다. 결국 5%를 제외한 대부분은 준비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운의 차이만은 아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생 시나리오에서 성공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은퇴 후 하지 말아야 할 4가지
직장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은퇴하면, 남은 인생에 대한 압박감과 불안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백세시대, 제2의 인생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은퇴 후 삶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기억해야 할,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낙담하지 마라
우리나라 평균 은퇴 연령은 50대 중반에서 60세 전후다. 100세 시대에 겨우 절반 조금 더 보낸 셈이다. 은퇴에 큰 의미를 부여해 인생이 끝난 것처럼 지낸다면 남은 인생이 무의미해진다. 그동안 일에 치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던 여가, 가족, 취미에 집중하라.
둘째, 자식들의 미래에 과도하게 지원하지 마라
자식이 사업을 시작한다거나 결혼한다고 모아둔 노후 자금을 전부 주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식이 더 나은 인생을 살길 바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자신의 인생도 생각해야 한다. 노후자금을 우선으로 하고 자식에게는 적정선까지만 지원하라.
셋째. 잘 모르는 분야에 주식투자하지 마라
주변에서 주식으로 큰돈 벌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동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식으로 돈방석에 앉을 확률보다 원금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넷째, 준비되지 않은 창업은 금물
은퇴 후 퇴직금을 모아 치킨집, 프랜차이즈 카페 등을 창업하는 경우가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8년 사이 창업한 사업체 중 1년 미만 생존율이 78.9%다. 창업 후 일이 풀리지 않으면 더 비참한 삶으로 치달을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노후에는 네 가지 기둥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이르면 50대 중후반, 늦어도 60대가 되면 부부가 퇴직 후 함께 생활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 인생의 황혼기에 평안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할 네 가지가 있다.
건강, 배우자와의 관계, 경제력, 취미.
이 네 가지는 은퇴 후 갑자기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가야 하는 삶의 기반이다.
공존(共存), 공생(共生), 공감(共感)하며 살아가기
인간은 관계의 집합체이며 오직 관계만이 인간을 살게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혼자서는 성장할 수 없고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 우리는 실타래처럼 얽힌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아플 때 가까운 사람의 손길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공생(共生)은 서로 다른 존재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번영하는 관계다.
공존(共存)은 서로 다른 존재가 같은 공간과 시간에 함께 존재하는 상태다.
공감(共鳴)은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이해하고 함께 느끼는 태도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고, 먼저 사과하고, 아내의 마음을 들으려 노력하면서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민도, 고통도, 기쁨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게 결국 부부의 힘이 아닐까.
100세 이상 장수노인들에게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였냐고 물었을 때, 대부분은 60~80대라고 답했다고 한다. 은퇴 후 인생이 끝난 것처럼 암울해하기보다, 공존과 공감과 공생의 마음으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준비를 해야 한다.
은퇴한 남자의 행복한 노후는 먼 곳이 아닌 집에서 시작된다.
나는 지금, 집에서 천천히 행복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