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 겨울이었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는데 살던 집이 이사 갔다고 했다. 밤늦게 집 주소를 물어서 찾아갔다.
군대 간 사이에 집안 형편이 기울었다. 아홉 식구가 평생을 살았던 28평 기와집 단층주택을 팔았다. 형이 시작한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판 것이었다. 멀지 않은 곳으로 방 두 개짜리 전셋집을 얻어 이사를 했었다.
집안이 어렵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정든 집이 아닌 낯선 집을 밤에 찾아가는 마음이 착잡했다. 어릴 적부터 아홉 식구가 살면서 추억이 깃든 곳, 동네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포근한 안식처를 떠나 있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하니 할머니가 먼저 반겨주셨다. 둘째 손자의 첫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셨던 할머니는 두 손을 맞잡아 어루만져 주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슬픈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온 식구가 반기면서도 마음은 무거웠던 첫 휴가의 기억이다.
가난했지만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시절
아버지는 시청 하급직 공무원이셨고, 어머니는 섬유공장에서 일하셨다. 그 월급으로 아홉 식구의 생활과 여섯 남매의 교육비를 감당하려니 한 치의 여유도 없었다. 할머니께서 집안 살림을 도맡으시며 손주들 여섯의 매 끼니를 챙기셨다. 어린 눈에도 가족의 생활이 팍팍해 보였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둘째 손자를 보면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셨다.
"우리 둘째 손자는 논두렁 정기를 타고 태어났어."
어릴 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할머니가 나를 예뻐하신다고만 생각했다.
아버지는 평생을 공무원으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셨다. 어머니는 밤 열두 시에 주무시고 새벽 네 시면 일어나 가족 생계를 위해 시장에 생선 장사를 나가셨다. 그 부지런함을 나는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웠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면 하늘이 알아준다."
그 고달픈 삶을 보면서 나는 다짐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가난을 벗어나리라고.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눈빛
유난히 자존심이 강했던 나를 부모님은 알고 계셨다. 또래 친구들 앞에서 기죽지 않게 하시려고 애쓰셨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어린 마음에 부모님을 아프게 한 적도 있었다.
여섯 남매의 기성회비는 우리 가족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내일 아침에 마련해 줄게."
어머니의 그 말에 나는 버텼다. 안 주면 학교에 갈 수 없다고. 어머니는 동네를 다니며 돈을 빌리셨다. 손에 쥐여주시던 그 돈, 그리고 미안함이 담긴 슬픈 눈빛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날이었다. 출발하는 아침, 학교 수학여행버스 앞에서 어머니는 빌려온 돈을 내셨다. 동네에서 급히 빌리신 것이었다. 나는 버스에 올라 경주에 도착할 때까지 친구들 모르게 숨죽여 울었다.
왜 우리 집은 이렇게 가난할까. 밤이면 하늘의 별들을 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방법을 몰랐다. 다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반드시 부자가 되겠다고.
소년에서 청년으로
중학교 때는 집에 보태고자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자전거로 20분 거리의 신문배급소에서 200부의 신문을 돌렸다. 고등학교 방학 때는 배관공사 일을 하는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날은 옆동네 집에서 방바닥 난방공사를 하느라 얼굴에 검댕이 묻은 상태로 학교 친구를 만났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숨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추석이나 설날이면 동네 친구들이 새 옷을 입고 골목에서 자랑을 했다. 나는 세 살 많은 형의 옷을 물려 입는 게 당연했다. 어느 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나중에 우리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큰아이 옷을 작은아이에게 입히지 않겠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아들을 한 살 차이로 키우면서 나는 이상한 걸 깨달았다. 아내가 큰아이에게 옷을 사주고 둘째에게 물려 입히려 할 때마다 나는 몰래 못하게 했다. 어릴 적 내가 일기장에 썼던 그 다짐이 무의식 중에 나온 것이리라.
초등학교 때는 야구부, 중학교 때는 유도부에서 운동을 했다. 부모님은 반대하지 않으셨다. 운동부의 단체 규율과 끊임없는 훈련은 나중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성실하게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되었다.
운명을 바꾼 선택
그 시절 우리나라는 산업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공업계와 실업계 학교 진학도 성적이 좋아야 했다.
전국 중학교에서 학년 5등 안에 들어야 입학이 가능한 국립구미전자공고는 서울의 경기고등학교만큼이나 우수한 학교였다.
아버지 말씀대로 나는 5년제 영남대 병설 공업고등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세 살 많은 형은 그 학교에 못 갔기에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입학을 무척 기뻐하셨다. 3년 과정의 고등학교와 2년 과정의 초급대학을 함께하는 학제로, 전국에 여섯 군데밖에 없었다. 내가 입학하고 이듬해부터 이 제도는 폐지되고 2년제 전문대학이 학생을 뽑기 시작했다.
5년제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 포항제철에 취직했다. 그러면서 대학 편입을 하여 공부를 하였다.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아내는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었다.
진짜 꿈은 달랐다. 대기업 삼성에 들어가고 싶었다. 군제대 후 삼성에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서류심사에서 탈락했다. 시험응시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는 꼭 삼성에 입사하겠다.'
그리고 꼭 10년이 지났다. 나는 삼성그룹 경력직 공채에 과장으로 입사했다. 34세의 일이었다. 10년 전 전문대졸 신입사원 공채에서 서류 탈락했던 그 사람이, 이제는 과장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1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는 5년제 전문대 졸업자에서 4년제 대학을 과수석으로 졸업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국내 최초로 미국 기술과 합작으로 대규모 반도체용 실리콘웨이퍼 공장의 크린룸을 시공한 건축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사람은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한 결과였다.
현장소장에서 기술사까지
삼성에 입사한 후 나는 화학공장 건설현장 건축과장으로 근무했다. 과장으로 입사한 지 3년 만인 38세 나이에 울산의 대규모 화학플랜트 공사 현장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기계와 설비 배관 팀장들은 나보다 나이도 많고 직급도 높은 차장들이었지만, 우리는 좋은 팀워크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38살에 대규모 화학플랜트 현장소장을 맡은 일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회사에서 내 책임감과 성실함, 부지런함을 알아보고 이른 나이에 소장으로 발령을 낸 것이었다.
건축담당 과장 시절에는 목표 공기를 맞추기 위해 200명의 인력과 함께 닷새를 밤샌 적이 있다.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던 공사를 무사히 마쳤다. 한여름 장마철에 대규모 지하 터파기 공사를 해야 했을 때는 다들 위험하다며 연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사업주 쪽에서 생산 일정을 맞춰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철골구조물로 지하를 보강하면서 밤낮으로 안전하게 공사를 진행해 약속한 일정에 맞췄다. 그때 사업주의 대표이사가 우리 회사 대표이사에게 직접 전화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는 후문이었다.
나는 평소 "사람이 하는 일에 안 되는 일은 없다"라고 생각했다. 어려움이 닥치면 "그래, 해보자. 사람이 해서 안 되는 일은 없어"라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부하 직원들은 한동안 내 그런 스타일을 얘기하곤 했다.
현장소장으로 일하면서도 나는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았다. 기술사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 기술사는 이공계 졸업 후 전공 분야에서 5년 이상 근무해야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합격률은 5~10% 내외. 회사에서는 시험을 위해 3개월간 유급휴가와 학원비를 지원했지만, 매년 많은 직원들이 응시해도 합격자는 적었다. 현장소장으로 일하며 공부를 병행해 합격하니 직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운명을 바꾼 친구의 한마디
1999년, 부산 해운대 아쿠아리움 수족관 현장소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친구가 물었다.
"넌 나중에 퇴직 후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어?"
40대 중반, 현장소장으로 바쁘게 일하던 나는 퇴직 후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친구가 덧붙였다. "아내들은 매달 월급을 생활비로 쓰지, 저축이나 재테크는 보통 안 하더라. 지금 네가 받는 현장소장 연봉은 20억 원짜리 부동산 수익과 비슷해. 그런데 현직을 떠나면 그 20억 자산도 같이 사라지는 거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 진짜 가진 게 없어?"
"우리 사주 주식은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어?"
"방법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때까지 재테크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신문에서 본 기사가 떠올랐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장녀가 훗날 신라호텔 지분을 받을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신라호텔 주식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주가는 8,500원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2010년, 주가는 8만 원까지 올랐다.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훗날 부동산을 매입할 때, 그때 모은 신라호텔 주식 2만 5천 주가 중요한 종잣돈이 되었다.
중국 16년, 그리고 새로운 도전
2005년, 나는 회사의 중국 현장소장으로 발령 났다. 상해 인근 타이어 공장 건설 현장으로, 2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2년이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귀국할 때까지 16년 해외 근무로 이어졌다.
중국에서 나는 회사의 현지 전문가로, 대형 프로젝트 책임자로 일하며 회사 경영에 큰 실적을 냈다. 전문 임원으로 승진했고, 삼성반도체 중국 현장 총괄 책임자로 근무하며 성과에 따른 보상을 받았다.
2014년, 나는 중국에서 삼성을 퇴직했다.
이후 현지 중국 건설회사와 공동사업을 진행했다. 한국의 현대자동차 중경공장, 남경의 금호타이어, 하이닉스 중경공장 건설사업을 6년간 맡아 중국에서 사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퇴직을 앞두고 나는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노년에 월급처럼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건물주가 되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부동산 공부를 위해 대학원에 입학했다. 강남 부동산의 지식과 정보를 배웠다.
'땅을 한 평 사더라도 강남땅을 사라.'
지하철 역세권, 인구 유동이 많은 강남의 땅을 보는 안목을 길렀다. 57세 나이에 퇴직하면서 서초동에 부지를 매입해 6층 건물을 지었다. 이듬해는 이태원에 4층과 7층, 두 개의 건물을 더 지었다. 부동산 대학원에서 얻은 지식으로 부지 매입부터 은행 자금 조달, 임대, 세금, 준공 업무까지 배운 대로 잘 마무리했다.
그렇게 나는 건물주가 되었다.
강남 건물주가 되기까지
건물주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자금이었다.
25년 전 친구 말을 듣고 신라호텔 주식을 10년 넘게 모은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운 좋게도 주가가 크게 올라 투자 대비 몇 배의 이익을 보았다.
부동산은 자기 자본의 두 배로 투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자본이 30억이면 60억에서 80억짜리 건물을 지어 보유할 수 있다. 은행에서 건물 가격의 40%까지 대출이 가능하고, 건물 완공 후 임차인들의 보증금이 건물가의 20% 정도를 차지한다. 자기 자본 40%에 은행 대출 40%, 임대보증금 20%를 합쳐 100%의 건물주가 되는 구조다.
강남이나 이태원 같은 지역은 은행에서도 안전자산으로 본다. 저리로 쉽게 담보 대출을 해준다. 반면 비인기 지역은 대출 심사가 까다롭다. 은행도 강남이나 상승 지역에 돈을 빌려줘야 안전하니까.
강남 부동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 상승률이 주식이나 은행금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실제로 2014년 서초동에 건물을 지을 때 토지매입비와 건설비로 약 40억이 들었다. 그런데 준공 직후 강남의 부동산매매업체에서 65억에 매입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 금액의 두 배가 되었다.
부동산의 가치는 위치와 유동인구, 특히 지하철 역세권 여부에 달려 있다. 지하철에서 가까운 강남 건물은 계속 상승할 것이고, 그래서 강남 부동산 불패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어머니의 유산
세월이 흘러 내가 강남 건물주가 되고 자산가가 되었다는 소문이 났다. 주변 친인척들이 생전에 어머니께 물었다.
"어떻게 키우셨길래 그렇게 성공했어요?"
어머니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자식들에게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다만 어떻게 열심히 살아가는지를 내 인생으로 보여줬을 뿐입니다."
대가족의 며느리로, 육 남매의 엄마로 살아온 어머니의 강인함과 성실함을 보여준 한마디였다.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가장 좋은 교육은 아이 대신 비를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비바람 속에서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가르치는 것이다. 가장 값진 가르침은 물질이 아니라 어려움을 이기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다."
어머니의 삶은 내가 열심히 살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용기를 가르쳐주셨다.
어릴 적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부모님의 근검절약과 부지런함을 보고 배웠다. 성공하기 위해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면서도 늘 가까이한 책들과 배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삶을 살아왔다.
꿈은 왜 크게 가져야 하는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내 아들과 주변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인생의 꿈은 될 수 있으면 크게 가지라고.
꿈은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고, 인생 항로에서 등대와 같다. 바다를 항해할 때 등대 없이는 항해할 수 없듯, 우리 삶에서 꿈과 목표는 그와 같다.
첫째, 꿈의 크기가 작은 곳에는 성공의 기회가 별로 없다. 작은 곳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손쉽게 기회를 다 차지한다. 반대로 사람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큰 목표, 예를 들어 건물주가 되겠다는 꿈에는 경쟁자가 적다. 퇴직 후 커피점이나 치킨집을 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연 매출 100억 원대의 프랜차이즈를 만들겠다는 꿈은 다르다. 꿈을 크게 가져야 오히려 경쟁자가 적다.
둘째, 큰 꿈은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경험은 크다.
꿈을 크게 가지면 그 꿈을 향해 더욱 노력하게 된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도 주변에 말했다. "나는 10만 부 팔리는 작가가 되겠다." 말은 습관이 되고 행동이 되며 스스로 동기부여가 된다. '5,000부 책도 팔기 어렵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1,000부도 팔기 어려워진다. 큰 꿈을 가지면 나중에 포기하더라도 그만큼 높은 위치를 경험하게 된다.
셋째, 꿈은 내 삶의 목표다.
내 삶의 최종 목표는 30대에 이루는 것도, 40대나 50대에 이루는 것도 아니다. 인생 전반에 걸쳐 준비하고 마지막에 꿈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이어리와 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과 꿈을 펜으로 다이어리에 기록하고, 그 꿈을 다시 읽으며 다짐했다. 전문 자격증 취득, 대기업 임원 승진, 건물주, 강남 건물주, 10만 부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 팔로워 5만 명 모으기, 책 5권 출간하기 등 세부적인 꿈을 다이어리에 적어놓으면 그것이 꿈이 되고 내 삶의 원동력이 된다.
매일 스스로에게 "나는 부자가 될 거야", "나는 강남 건물주가 될 거야"라고 외친다면 그 사람은 부자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부자가 나온다. 꿈을 크게 가지는 사람들에게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나온다.
꿈을 크게 가지지 않는다면 성공할 마음의 동력도 떨어지고 성공할 확률도 낮아진다. 인생의 큰 꿈을 가져보자. 실패해도 괜찮다.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가면 된다.
논두렁 정기의 비밀을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논두렁 정기'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가난했지만 서로를 위해 희생했던 가족의 사랑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어머니가 보여준 그 부지런함과 아버지의 성실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나 자신의 의지였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논두렁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평생 나를 이끌어주는 힘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나침반이었다.
목표를 향한 첫걸음이 성공의 첫 발걸음이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삶의 여정에서 일찍이 목표를 발견하고,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은 사람이다. 성공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요즘도 다이어리에 꿈을 적는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들이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그 꿈들을 향해 다시 걸어간다.
이 글을 쓰면서 하늘에 계신 할머니와 부모님을 먼저 떠올린다.
논두렁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고 웃으시던 할머니의 손길, 새벽어둠을 뚫고 일터로 나가시던 어머니의 발걸음, 평생을 정직과 책임으로 사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강남의 건물 몇 채가 내 삶의 전부는 아니다.
그 안에는 가난을 벗어나겠다고 다짐하던 어린 시절의 눈물과, 묵묵히 삶을 보여주신 부모님의 땀이 함께 서 있다.
나는 다만 그 가르침대로 살았을 뿐이다.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그리고 끝까지..
누구나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성공자가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