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그 집 이름은'웃집'이었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그 집을 ‘웃집’이라고 불렀다.
차도 다니고, 자전거도 다니고, 더러 경운기나 트랙터도 지나가는
이면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00라사’ 였다가 ‘00 세탁소’가 된 우리 집이 있었고,
그 맞은편 길가에서 조금 경사진 터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우리 집이 ‘웃집’이었다.
웃도리의 표준어가 윗도리인 것처럼, ‘웃집’은 그렇게 이해하면 될 것이다.
초록색 칠이 벗겨진 철문은 낮 동안에는 항상 열려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인데, 지금으로 치자면 다세대 주택이라고나 할까.
거꾸로 쓴 기역자형 지붕 아래 다섯 집이 방 한 칸씩을 차지하며 살던 집이었다.
방 한 칸마다 딸린 부엌이 있었고, 화장실은 마당 한쪽 구석에 놓아 다 같이 쓰고 있는 그런 집.
방의 크기는 제각각이어서 어떤 집은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어떤 집은 아이 하나와 부부가,
또 어떤 집은 할머니와 손자 손녀 넷이, 또 어떤 집은 세 명의 여고생 친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
그리고 부엌이 따로 없는 방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 세 자매가 그 방에서 함께 지냈다.
마당은 중형 자동차 한 대와 소형 자동차 한 대를 동시에 주차할 수 있는 크기였고,
한쪽에는 펌프질을 해야 하는 지하수가 있었다. 그 옆으로 장독대가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화단이 있었는데 봉숭아, 해바라기, 채송화, 나팔꽃, 국화 등이 제 계절을 따라 피고 졌다.
살구나무와 돌배나무도 있어서 봄이면 살구꽃, 배꽃이 수줍고 아련하게 피고 졌다.
항상 열려 있던 대문과는 달리 시멘트로 바른 담 위에는 철조망이 친친 감겨 있었고,
사이사이 깨진 유리가 박혀 있었다. 낮은 담을 우습게 보지 말란 뜻이었을까.
그래도 그 담을 넘는 이가 있었다. 한 번은 도둑이기도 했고, 두어 번은 누군가들의 연인이었다.
그 집에는 들고 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고 떠났다.
월세로 살던 이들이었으니 1년도 채 안 돼서 떠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이가 태어나 어린애가 될 때까지 살다 떠난 이도 있었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도 있었다.
내 유년의 기억도 ‘웃집’에서 시작된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 밀레니엄까지...
우리 형제들은 그 집에서 오래도록 살았고, 그 집에서 스무 살을 맞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 집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남아 그 집을 지켰던 부모님도 집 앞으로 큰 도로가 나면서 떠나왔고,
집은 허물어졌다.
우리가 살았던 집이 허물어졌다는 소식을 멀리서 접하던 그날의 기분은 참, 이상했다.
부모님은 시원섭섭하다 하셨고, 우리 형제들은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이라고 다들 말했다.
그리고 왜 남아 있는 사진 한 장이 없는 걸까...아쉬워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사진이란, 요즘처럼 막 찍어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맨날 눈 뜨고 밥 먹고 자는 집을 사진 찍진 않았으니까.
안타깝게도 각자의 기억 속에 각자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게 됐다.
언젠가는 그 마저도 희미해져서 아주 잃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그러니까 기억하고 기록해 보려 한다.
그때 우리가 살았던 집의 이야기를.
더 흐려지기 전에, 더 지워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