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에서 인간이 되어 돌아오리라.
새벽잠을 설치고 4시 반 알람소리에 눈을 뜬다.
반무의식의 상태로 세면대로 향하는 발걸음, 걸음걸음마다 모든 관절이 분절되어 뚝뚝 소리를 낸다.
오늘은 멀리 여정을 떠나는 스케줄이 있는 날이다.
지난한 일주일을 보낸 나는 오늘 이 일정이 귀찮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하고, 아무 감정이 없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독서모임에서 부산에 계신 회원들을 만나러 가는 일정이 잡혔다.
리더가 같이 가자고 하는데, 요즘 무기력에 빠진 나는 일정이 있다고 대답하며 잠시 결정을 망설인다.
삶의 갈피를 잃은 요즘의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침에 눈을 뜨기도 싫고..
동굴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머릿속만 복잡한 칩거인이다.
그런 나를 밖으로 끌어내주려는 리더다.
"하루지만 기차 타고 타지에 가서 환경을 바꾸고,
바다보고, 맛있는 거 먹고, 사람들 만나면 에너지 받을 거야. 그러면 또 상쾌한 기분이 될 거야. 가자."
'그래, 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이 무기력이 오래되었기에 그 하루가 내게 큰 영향은 없을 것 같단 말이다.'
라고 마음속에서 아우성치고 있고,
머릿속으로는 '그래 그럴 거야. 그럴 거야.'라고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는 입으로 대답한다.
"그래, 그럴 거야. 그러자. 같이 가자."
이 작은 선택이 오늘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지 모르지 않은가.
태도와 결과의 상관관계, 태도를 바꾸면 결과도 바뀌고, 그러면서 인생이 바뀌어 간다고들 하더라.
작은 선택 하나에도 생각이 참 거창한 나다.
서울역에서 아침 6시 반에 부산으로 떠나는 열차.
리더와 나는 6시에 서울역에서 만났다.
새벽부터 움직이기 배가 고팠던 우린, 동시에
"맥모닝 먹자."
몇 차례 리더와 동행하는 지방행에 빠지지 않는 우리의 코스다.
간단한 요기 후 시간에 맞춰 열차에 오르고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주말 새벽에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뭐 그리 많은지, 예약할 때 붙은 자리가 없어 따로따로 좌석 배정이 되었다.
둘이 가는데, 혼자 가는 기분.
혼자 앉아 또 수많은 생각에 잠긴다.
생각하기 싫어 책을 꺼내 읽는다.
자꾸 다른 생각이 튀어나와 독서를 방해하지만, 치열하게 잡생각을 방어하며 책에 집중해 본다.
나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자기 계발서를 연달아 읽고 있는 요즘이다.
자기 계발서들은 알고 있어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 성공을 향한 바람직한 태도 들을 반복적으로 말해준다.
인간은 부정적인 뇌파가 더 세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마음을 부정적으로 다시 되돌리려 한다는 것처럼,
알고 있는 걸 자꾸 잊는 망각의 습성에서 벗어나 잊지 말라고 끊임없이 일깨워 준다..
어느덧 종착역인 부산역에 도착, 광안리 약속 장소로 향한다.
오랜만에 방문한 부산이라 전철 노선도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언제가 마지막 부산 방문이었더라...
그때만 해도 내 기억에 전철이 1호선은 온전하게 운행하고, 2호선을 연장 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보니 4개의 노선에 공항으로도 전철로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세상은 계속 발전하고 변하고 있다.
와... 오래 살았다.. 하
광안리 역에서 내려 광안리 해안 쪽으로 진한 부산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걷는다.
'그래, 오길 잘했어. 우후! 기분 좋아.'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서울과 비슷한 도심의 길을 걷다가 빼꼼히 나타나는 광안대교와 바다의 모습.
순간적으로 바람의 기온도 확 차가워진다.
전날까지 비가 많이 왔다고 하는데, 내가 도착한 부산 하늘은 쾌청하기 짝이 없다.
금방 짠 물감처럼 파란 하늘, 마치 다이아몬드를 뿌려놓은 것 같은 바닷물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
에어컨 바람 저리 가라 시원한 바닷바람,
이국적인 지푸라기 파라솔들이 박혀있는 활기 넘치는 모래사장.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완벽했다.
여기에 시원한 편의점 맥주 한 캔이면 금상첨화!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자 약속장소로 하나 둘 회원님들이 모여든다.
부산 모임이지만 부산, 대구, 서울에서 서로의 얼굴 보자고 귀한 시간과 사비 들여 모인 우리 8명,
한 명 한 명 들어설 때마다 서로 반가워서 손을 맞잡고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인사를 나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메뉴판에 이탈리안 메뉴들이 글로 설명되어 있는데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면서 이미 뱃속에서 오케스트라 연주가 펼쳐지고 있는 중이다.
파스타, 브랙퍼스트, 비프와 쉬림프 필라프 등 갖가지로 주문했고 음식에 서빙되어 나온다.
오색 색깔로 아기자기하게 플레이팅 되어있어 눈이 즐겁고, 코가 즐겁고, 입이 즐겁다.
기분 좋은 햇살 덕에 더 예쁘기도 하고 맛있기도 한 점심 식사를 함께하며 즐거운 수다수다, 박장대소 깔깔깔,
실없는 농담부터 건설적인 계획 나누기까지 쉴 틈 없이 웃고 떠든다.
게다가 날씨가 도와줘서 더 예쁜 광안리바다와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인별그램 릴스용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야 한다며 이리저리 이동하며 포즈 잡고 찍어대는 셔터 소리와 웃음소리,
환호가 요란하다. 너무 웃어 광대가 아프다.
자주 보지도 못하는 분들인데 어째서 만날 때마다 이렇게 끈끈한 걸까.
그런 그들과 함께 있으니
이미 그들의 참여의식에 마음이 차오르고,
그들의 진심 어린 독서에 대한 열정에 자극받고,
따뜻한 배려와 마음에 감사와 뜨거운 에너지를 가득 받는다.
이러니 우리 리더의 '가자 제안'을 어떻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느덧 서울로 가야 할 열차 예약 시간이 다가오고 있고,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사람은 모두
사람으로부터 상처받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사람으로부터 문제가 싹트고,
사람으로부터 해답이 나오고,
사람으로부터 에너지를 빼앗기고,
사람으로부터 에너지를 받는다.
한동안 좀비 같았던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