튠 호수, 인터라켄 - 스위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배경에서 노을을 보고 싶다? 그렇다면 튠 호수가 제격이다.
보통 노을이 아름다운 곳은 어딘가의 '끝'에 있다. 노을은 해가 지며 흘리고 간 흔적이기 때문에, 끝에서 봐야 제일 잘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끝과 내려앉음이라는 이미지가 겹쳐져서 그럴까? 노을은 보통 아련하고 소멸하는 속성을 지닌다. 아마도 그런 속성들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해서 많은 사랑을 받는 게 아닐까.
튠 호수의 노을은 조금 다르다. 분명 무언가의 끝을 알리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하고 광활한 감각을 전달한다.
튠 호수를 즐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크루즈를 타는 것과 두 발로 직접 걷는 것이다. 체력에 여유가 있다면 걸어도 되고, 지쳐있는 상태라면 크루즈를 타는 게 좋을 것이다. 무엇이 됐든 그 끝에는 분명 치유함이 기다리고 있다. (유레일 패스로도 탑승 가능하니 횟수가 여유롭다면 크루즈를 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해가 지기 한 시간 정도 전에 두 발로 인터라켄을 출발했다. 처음에는 호수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좁은 물길과 끝없이 들어선 숲길이 계속된다.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를 위한 완급조절이라 생각하고 버텨본다. 고통 뒤에 환희가 찾아오듯.
그렇게 30분을 조금 넘게 걷다 보면 물길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물의 색도 점점 진해진다. 하늘을 바라보면 해가 슬슬 지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노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흩뿌린 빛이 호수에 닿아 짙은 에메랄드 색이 된다.
조금 더 가다 보면 여태까지 안고 온 답답함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 좁았던 호수가 갑자기 수십 배는 넓어지며 바다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우연찮게 시간 조절을 잘한 것 같았다. 노을이 내리기 직전의 하늘이 에메랄드 색 호수에 거울처럼 비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늘의 색이 그대로 호수에 담겨 있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페리도 없었기에 수면에는 큰 파동도 없었다. 쌀쌀한 바람이 남기는 잔물결만이 고요히 흘렀다. 그런 호수를 보니 마치 하늘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산맥들. 끝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 알프스 산맥의 장대한 흔적이 내 시야를 넘어 끝없이 펼쳐나갔다.
내가 알고 있는 친숙한 느낌의 노을은 아니었다. 거대한 황혼. 그 어디에서도 이렇게 광활한 하늘, 산, 호수가 한 곳에 어우러진 것을 본 적이 없다. 거기에 내려앉은 다소 밝은 느낌의 노을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완벽한 힐링이다. 긴 시간 동안 걸어서 지친 몸과 좁은 길을 계속 참느라 생긴 답답함이 한 번에 확 풀린다.
인생에서 좁은 길을 걸어갈 때 가장 큰 힘이 되는 건 좁은 길이 끝나리라는 막연한 희망이다. 아무리 그 길을 걷는 게 조금 더 편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희망이 되어줄 순 없다. 그것이 답답함을 끝내주지는 못한다. 좁은 길의 종착점에 다다렀을 때, 드넓은 길이 펼쳐 저 있을 것이라는 희망만이 그 길을 끝까지 견디게 해 준다.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를 몸소 체감할 수 있는 곳이 튠 호수였다. 일상이 갑갑할 때, 어딘가로 훅 떠나서 지친 마음을 탁 트이게 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