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담은 호수

튠 호수, 인터라켄 - 스위스

by 스토리텔러

내가 반한 노을 #2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배경에서 노을을 보고 싶다? 그렇다면 튠 호수가 제격이다.


보통 노을이 아름다운 곳은 어딘가의 '끝'에 있다. 노을은 해가 지며 흘리고 간 흔적이기 때문에, 끝에서 봐야 제일 잘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끝과 내려앉음이라는 이미지가 겹쳐져서 그럴까? 노을은 보통 아련하고 소멸하는 속성을 지닌다. 아마도 그런 속성들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해서 많은 사랑을 받는 게 아닐까.


튠 호수의 노을은 조금 다르다. 분명 무언가의 끝을 알리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하고 광활한 감각을 전달한다.


튠 호수를 즐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크루즈를 타는 것과 두 발로 직접 걷는 것이다. 체력에 여유가 있다면 걸어도 되고, 지쳐있는 상태라면 크루즈를 타는 게 좋을 것이다. 무엇이 됐든 그 끝에는 분명 치유함이 기다리고 있다. (유레일 패스로도 탑승 가능하니 횟수가 여유롭다면 크루즈를 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SAM_1702.JPG 좁디좁은 튠 호수


해가 지기 한 시간 정도 전에 두 발로 인터라켄을 출발했다. 처음에는 호수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좁은 물길과 끝없이 들어선 숲길이 계속된다.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를 위한 완급조절이라 생각하고 버텨본다. 고통 뒤에 환희가 찾아오듯.


호수3.JPG 해가 지는 튠 호수의 숲길


그렇게 30분을 조금 넘게 걷다 보면 물길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물의 색도 점점 진해진다. 하늘을 바라보면 해가 슬슬 지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노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흩뿌린 빛이 호수에 닿아 짙은 에메랄드 색이 된다.


호수44.JPG 마침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튠 호수


조금 더 가다 보면 여태까지 안고 온 답답함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 좁았던 호수가 갑자기 수십 배는 넓어지며 바다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우연찮게 시간 조절을 잘한 것 같았다. 노을이 내리기 직전의 하늘이 에메랄드 색 호수에 거울처럼 비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SAM_1712.JPG 끝이 가늠되지 않는 알프스 산맥


하늘의 색이 그대로 호수에 담겨 있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페리도 없었기에 수면에는 큰 파동도 없었다. 쌀쌀한 바람이 남기는 잔물결만이 고요히 흘렀다. 그런 호수를 보니 마치 하늘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산맥들. 끝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 알프스 산맥의 장대한 흔적이 내 시야를 넘어 끝없이 펼쳐나갔다.


내가 알고 있는 친숙한 느낌의 노을은 아니었다. 거대한 황혼. 그 어디에서도 이렇게 광활한 하늘, 산, 호수가 한 곳에 어우러진 것을 본 적이 없다. 거기에 내려앉은 다소 밝은 느낌의 노을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완벽한 힐링이다. 긴 시간 동안 걸어서 지친 몸과 좁은 길을 계속 참느라 생긴 답답함이 한 번에 확 풀린다.


인생에서 좁은 길을 걸어갈 때 가장 큰 힘이 되는 건 좁은 길이 끝나리라는 막연한 희망이다. 아무리 그 길을 걷는 게 조금 더 편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희망이 되어줄 순 없다. 그것이 답답함을 끝내주지는 못한다. 좁은 길의 종착점에 다다렀을 때, 드넓은 길이 펼쳐 저 있을 것이라는 희망만이 그 길을 끝까지 견디게 해 준다.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를 몸소 체감할 수 있는 곳이 튠 호수였다. 일상이 갑갑할 때, 어딘가로 훅 떠나서 지친 마음을 탁 트이게 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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