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또 다른 시작

세븐 시스터즈, 브라이튼 - 영국

by 스토리텔러

내가 반한 노을 #5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이미 많은 곳에서 쓰이는 상투적인 인용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말을 직접 체감하기란 쉽지 않다. 끝은 끝일뿐, 그 순간에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다. 어지간히 긍정적이고, 더 나아가 낙천적이 아니면 그걸 삶에서 직접 깨닫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치를 조금이나마 맛본 곳이 세븐 시스터즈다. 그곳에서 본 노을을 보며 무언가의 끝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세시8.JPG 노을이지만 찬란하고 시작을 알리는 듯한 모습이다


세븐 시스터즈는 런던 근교 여행지로 많이 사랑받는 곳이다. 브라이튼에 있지만, 보통은 런던 여행객들이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다녀오는 곳이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남부로 내려가면 브라이튼이라는 도시에 도착한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20~30분 정도를 가면 엄청난 크기의 초원이 등장한다. 그 초원을 가로질러 걷다 보면 일곱 개의 백악질 언덕이 장대하게 늘어서 있는 해안가에 도착한다. 영국의 최남단에 도착하는 것이다.


초원을 가로지르면서 보는 푸른 하늘과 녹색 초원의 아름다움은 덤이다. 그 위로 유유하게 풀을 뜯는 양들을 보며 언덕에 도착하면 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하면 끝이다.


세시9.JPG 노을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언덕


이곳은 영국의 남쪽 끝이자, 내 유럽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 기도 했다. 아쉬움과 시원 섭섭함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기도 하다. 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은 여행 막바지에 찾아오는 그 아련함과 시원함을 느껴봤을 것이다.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떠나기 싫은 미묘한 기분. 그 감정이 충만할 때 이 노을을 마주했다.


해가 지평선 뒤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구름 밑으로 내려왔다. 그 모습은 마치 태양이 구름을 뚫고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갓 태어난 존재가 그 모습을 맹렬하게 세상에 각인시키는 것 같았다. 갓난아기가 우렁찬 울음소리로 그의 삶을 시작하듯이.


더 이상 이 여행이 끝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을 이국 땅의 노을 같지 않은 노을을 보며 할 수 있었다.


노을.JPG 다시 구름 뒤로 숨어버리는 태양


홀로 떠나는 여행은 사람을 한층 더 성장시킨다. 그 어떤 여행도 예외가 없다.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단순한 진리는 누군가의 삶을 성숙하게 만든다. 설령 그 변화가 당장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경험들이 삶의 중요한 순간에 발현되며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왜냐하면 홀로 떠나는 여행은 내가 온전히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와 연결된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곳이기에 오롯이 나에게만 모든 신경을 쏟아부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극에 달할 때, 주변 환경에 신경 쓰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어쩌면 이미 내 주변에 있던 것들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며 점점 장님이 되어가는 바람에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노을2.JPG 안녕, 유럽에서의 마지막 노을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간단한 마음가짐은 후에 내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나를 아는 지인들은 말한다. '너는 어떻게 모든 상황에서 항상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해내는 거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는 눈이 생긴 거다'.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상황 속에는 새로운 시작의 씨앗이 숨어있다. 세븐 시스터즈의 노을은 이를 볼 수 있는 눈을 트이게 하는 곳이었다. 물론, 날씨가 좋다는 가정 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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