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_내 꿈의 이력서

그 빛이 나에게

by THe STory lab

구직 면접장에서


“졸업 후 10년 동안 뭐 하셨어요?”

경력난이 공백으로 남은 내 이력서를 보고 면접을 보러 간 인쇄소 사장이 던진 말이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그 구멍 사이로 꽃샘추위를 머금은 바람이 잔인하게 스쳐 지나갔다.

‘소설을 썼습니다. 시를 쓰기도 하고 시나리오를 쓴 적도 있고 작가가 꿈이어서 여러 글을 섭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10년 동안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글만 써 왔다는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웠다. 분명 백수로 10년 동안 아무 노력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하겠지 하는 생각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10년을 글을 썼다고 그것도 제대로 된 등단이나 공모전에서의 수상 경력 한 번 없이 글만 썼다고 말했다가 돌아올 비웃음과 편견어린 시선을 견디기에는 내가 이제 나이를 먹은 탓일까?

분명 내 꿈이나 내가 보낸 시간들을 이해해줄 거라 생각한 사람들에게 글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번 봉변을 당한 뒤 솔직하게 말하며 살기란 내게 더 어려워졌다. 소설을 쓰며 살고 있다 말한 나에게 자신에게 좋은 소설 소재가 있다며 대필을 부탁하며, 그 부탁을 거절하자 서른 넘어 직업 없이 소설을 쓰며 사는 놈은 미친놈이라고 같이 마신 술값까지 내게 부담하게 한 사람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인쇄소 사장과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나는 안 그래도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글을 쓰며 살았다 말하기를 포기하고 생각해낸 차선책.

“고시 공부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행정고시를 준비했지요. 그런데 몇 년 해도 합격 못했어요. 그래서 7급도 몇 년 준비하다 9급도 해 봤는데...”

말끝을 흐리는 내 말을 사장이 되받았다.

“계속 공부해 보지 그래요? 계속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 될 수도 있을 텐데...”

‘배가 고파서요. 더 이상 공부를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어요.’

이번에도 내 말은 다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일은 간단해요. 대학 홍보 책자에 들어갈 이야깃거리를 취재하고 글을 쓰는 일이에요. 그리고 아 참, 사람들 앞에서 말은 잘하나요?”

“네? 사람들 앞에서 말도 해야 하나요?”

글만 쓰면 되는 일이다 싶어 찾아간 내가 놀란 얼굴로 묻자 사장이 대답했다.

“시청이나 대학 본부 상대로 발표도 하고 경쟁 입찰도 해서 일거리를 따 와야 하거든요.”

내가 자신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장의 입가에 맴돌던 웃음기가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아무튼 구직 사이트에 광고는 해 놨으니 금요일까지 연락드릴게요. 연락이 없으면 우리 회사랑 인연이 없는 거구요.”

“감사합니다.”

사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일어난 나는 알았다.

‘아, 이번에도 떨어졌구나!’

역시나 금요일까지 면접을 본 회사에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내심 조금은 기대를 걸고 있었던 나는 내 예감이 적중해버리자 자존감이 바닥을 기었다.


글쓰기 공포증_창작 포비아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10년 동안 써 온 장편 소설을 냈던 공모전에서 내 소설이 예심에도 들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그날 밤 살기 싫었다. 아니,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데 내가 짊어져야 할 삶의 팍팍함이 나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만 같아 고통스럽고 무서웠다. 그래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서른도 훌쩍 넘어 내일 모레가 마흔인 사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꺼이꺼이 짐승처럼 소리 내며 울어버렸다.

나는 밤새 앓았다. 원래 튼튼하지 못한 몸이지만 절망이 나를 짓누르자 마음의 고통이 몸으로 옮아갔다. 누군가 개도 안 걸린다던 봄철 몸살감기로 나는 며칠을 아무 일도 못하고 밥도 못 먹고 그렇게 시든 시래기처럼 되어버렸다. 내가 시래기보다 못한 쓰레기가 된 듯했다.

그러다 예전에 시래기 국이 몸에 좋다던 어머니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왜 그때 어머니 말이 생각났을까? 갑자기 어머니, 엄마가 보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맨 처음 한 일은 10년 동안 읽었던 책과 써 왔던 원고들을 버리는 일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이 찢겨져 나갔다. 10년 동안 써 왔던 원고들도 마구 짓이겨졌다. 그러다 내가 가장 아끼는 창작 노트에서 손이 멈췄다. 이것만은 남겨두자 마음먹었다. 그러다 이 노트를 남겨두면 남을 글쓰기에 대한 미련이 너무 구역질날 정도로 싫었다. 미련이 아니라 더러운 찌꺼기로 남을 것만 같은 내 10년의 기록이 혐오를 넘어 공포로 다가왔다. 내게 밥 한 숟갈 떠먹여 주지 못하는 이 따위 책들과 원고들 창작 노트가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책들을 찢다 손이 아파왔다. 이럴 게 아니라 고물상에 팔아서 한 끼 식사라도 해결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우여곡절 끝에 리어카 한 대를 구했다.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같은 두꺼운 책들이 맨 처음 바닥 구석을 차지하며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리어카를 끌며 우리 동네 고물상이 있는 데까지 언덕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미끄러져 다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병원 갈 치료비도 통장 잔고에는 남지 않았다.

인상 좋은 고물상 아저씨가 나를 맞았다. 아저씨의 안내로 책들을 커다란 저울에 달았다. 1kg에 백 원을 준다고 했다.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시집 한 권만도 못한 값을 받고 내 10년의 기록을 몽땅 팔아넘겼다. 순결한 처녀를 단 돈 얼마에 욕구에 찌든 사내에게 팔아넘긴 사창가의 포주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때는 나도 꿈이 참 많았다. 태어나 맨 처음 품은 꿈은 아버지처럼 키가 크고 몸집도 좋고 단단한 몸을 갖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올려놓은 물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고 만지고 작동시키는 아버지의 큰 손을 꿈꿨다. 날카로운 칼날이 장착된 빙수기로 아버지가, 내가 좋아하는 팥빙수를 만들 때 특히 그랬다. 아버지의 손을 보고 있으면 나뭇잎의 잎맥들처럼 손바닥에 굵게 그어진 손금들이 기억난다. 아버지의 운명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를 그 깊게 파인 손금들에 비해 내 손바닥 손금들은 가늘고 약하고 초라했다.

초등학교 때 나는 아이들의 말을 듣기보다는 명령하고 지시하는 데 익숙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 시절 대개의 선생님들은 “바닥을 닦게 걸레를 빨아와라.”, “삐뚤삐뚤한 글자체를 똑바로 고쳐라.”, “구구단을 구단까지 틀리지 않고 외우게 늘 반복해라.” 식의 주문을 아이들에게 걸고는 했다. 말을 잘 하지 않는 아이였던 나는 아마 무의식에서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중고등학교 때는 만화가도 되고 싶었고 영화감독도 되고 싶었다.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왕가위라는 홍콩 감독이었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라는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실연당한 후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땀이 흐른다. 수분이 다 빠져나가 버리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한 끼 밥값도 안 되는 몇 천원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다 나는 다시 고물상 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달리다 보니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왕가위 감독은 거짓말을 했다. 땀을 흘리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친구처럼 늘 따라붙는다는 사실 말이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사는 사람에게 눈물이 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10년 동안의 내 열정과 노력을 부정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힘껏 달리다 보니 고물상의 상호가 보였다. 마침 고물상 주인아저씨가 내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저씨! 잠깐만요!”

내 목소리가 하늘 높이 울렸다. 동시에 내 창작노트 맨 첫 장의 글귀가 가슴을 울렸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고 살아가고 있고 결국 살게 될 것이다.’

(2013+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