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10. 13
입술이 가려워 죽을 지경이다. 입술을 부르트도록 긁어보지만 여전히 가렵다. 죽고 싶을 뿐이다.
-J의 일기 중에서-
J가 사는 집은 서울에서도 아주 외진, 그러니까 황야의 벌판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그의 보금자리(보금자리라는 의미가 몸을 눕힐 수 있는 공간이라면)를 조금 설명하자면 그의 방에서 느껴지는 냄새를 간과할 수 없다. 내가 시각적인 요소가 아닌 후각적인 것으로 그의 방을 설명하려는 것은 그의 방이 후각만으로 눈앞에 와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그의 방에선 오래된 나무 창틀에 끼어있는 먼지 냄새가 난다. 먼지의 냄새를 맡아본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그의 방엔 나무 창틀의 먼지 냄새가 난다. 그 방에서 그는 회색빛 햇빛과 함께 일어나고 어두운 달그림자와 함께 잠이 든다.
그의 방이 좀(?) 퇴폐적인 분위기라고 해서 그가 하루 종일 죽음이나 뭐 그런 것들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고능력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그는 가끔 삶에 대한 희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다만 요즘 들어 그의 입술이 몹시 가려워 그를 못 견디게 한다는 것이 절망적 사건이었다. 그는 불면증 증세까지 일으키는 가려움증을 치료하기 위해 없는 돈으로 병원을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가려움증은 그를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오늘도 그는 어젯밤 밤새도록 깨문 부어터진 입술을 느끼며 집을 나섰다.
마침 좁은 마당에는 그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 주인 여자가 세수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를 보자 눈꺼풀을 크게 치뜨며 그에게 다가섰다.
“아저씨, 방을 얻었으면 돈을 내야 할거 아니요. 이거야 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두세 달씩 미루니 우째 내가 살겠소. 말 나온 김에 여서 담판을 지얐뿝시다.”
여자는 수건에 거친 손을 닦으며 쉴 새 없이 얘길 한다. 그는 여자에게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지만 그는 알고 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여자는 자기 얘기를 쏟아낼 것이다. 오늘도 여자는 아주 열심히 얘기를 하고 나선 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을 나서자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는 동네 어귀를 나서서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했다. 그는 길 건너 식당으로 눈을 돌렸다. 아침을 안 먹었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공복감이 그에게 다가선 까닭이다.
횡단 보도에 서서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길 기다리며 반대편을 지그시 응시한다. 그는 아스팔트 도로가 바다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갑자기 그는 바다를 건너고 싶다는 욕구가 든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스팔트 도로 위로 발을 내민다. 수평선 아니 반대편을 응시하며···.
그때 자동차 경적 소리가 나며 그의 환상을 깨웠다.
“야, 개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냐?”
그를 노려보는 수 많은 눈들 앞에서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타인들은 그가 말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고개를 숙이고 걸어간다. 수많은 시선이 그의 뒤 꼭지를 응시하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에 들어간 그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장사를 할 마음이 없다는 듯 주인 여자는 좀처럼 그에게 주문을 받지 않고 전화통만 붙잡고 있었다. 곗돈이라느니 사교댄스라느니 하는 그런 단어를 인식하며 그는 그가 직접 따른 물을 세 번째로 들이킨다. 주인 여자는 그라는 존재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계속 전화에 대고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자기 존재를 알리려는 듯 헛기침을 해 보지만 여자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전화질을 열중한다.
그는 일어섰다. 그가 가게 문을 나서려 할 때 늙은 여자 하나가 의아한 눈빛으로 들어섰다.
“아니 이 여편네가, 가게 좀 봐 달라고 했더니, 오는 손님은 내쫓고 계속 전화질이야.”
늙은 여자의 흥분에 찬 목소리에 전화하던 여자는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미안하다며 다시 앉기를 권하는 늙은 여자를 물리치며 그는 가게를 나섰다.
이제 그는 배고픔도 잊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는 놀이터로 향한다. 놀이터엔 여자아이가 그네를 타며 놀고 있었다. 여린 손목으로 그네를 밀어내기가 힘든 듯 보였다. 그는 여자아이의 그네를 밀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아이에게 말을 걸기도 전에 한 젊은 여자가 그에게 적의에 찬 눈빛을 보내며 아이를 안고 사라졌다.
공허함, 그는 공허함을 느꼈다. 그의 방에서 느껴지는 그 외로움의 냄새가 지금도 그를 감싸는 것 같았다. 그는 그네에 올라타 흔들어 보지만 공허함이 깊어져만 갈 뿐이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자문에도 지쳤다.
방, 신호등, 식당, 놀이터···그는 이제 아주 색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아무도 가지 못한 곳으로···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필요 없는 곳으로···그래서 그는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20층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지금 이 순간 그만이 이곳에 있다는 걸 느끼며 그는 행복함을 느낀다. 그는 영원히 이곳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 아닌 죽음을 행하기로 했다. 발 끝을 조금씩 조금씩 공기 중으로 내몰며 그는 두려움 대신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편안함을 느낀다.
‘쿵’
한 남자가 20층 건물 앞에 엎어져 있다. 그를 발견한 젊은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 간다.
남자는 여자가 ‘괜찮아요?’라고 물으면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잰걸음으로 사라져 가는 여자를 바라보며 다시 입술이 가려워짐을 느낀다.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