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적은 문제로부터 다 시작한다. 내 눈을 검진한 의사는 6개월이라고 못을 박았다. 진단명은 황반변성이었다. 늙은 나이에 보통 오는데 고도 근시와 고혈압, 이른 나이의 당뇨 등으로 인해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발병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6개월 이내 갑자기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며 일단은 눈에 놓는 주사 치료가 이른 감이 있으니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절망감으로 6개월이 되기도 전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병원을 나와 맨 먼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오늘 나의 안과 검진이 있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 나는 계속
“6개월 이내 시력 상실 위험.”
만 중얼거렸다.
“뭐라고? 뭐라고?”
걱정스레 계속 되묻는 그녀의 물음에 제대로 답도 못하고 전화를 끊은 탓인지 집에 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 개 넘게 카톡 알림이 와 있었다. 모두 그녀의 메시지였다.
밤이 되고 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우두커니 어두운 방에 혼자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데 현관 벨소리가 울렸다.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열자 후덥한 도시의 열기와 함께 여자 친구가 들어왔다 내 전화를 받자마자 걱정이 돼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싶어 막차 기차표를 끊었다 했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뛰어와 얼굴이 땀 범벅이었다.
둘이 냉장고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소주를 빈 속에 들이켜서인지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선뜻 서로에게 말을 먼저 꺼내지 못했다. 무거운 공기가 세상에 단 둘만 남은 우리를 짓누르는 듯했다. 지친 탓인지 나는 고개를 숙이고 들지 못했다.
여자친구는 늘 나보다 강단이 있었다. 우리가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 시내 대형 입시 학원에서 고등학생 형들에게 돈을 뺏기고 있는 나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그녀가 구해 준 전력이 있었다. 태권도 단수도 나보다 더 높았다.
침묵이 이어지다 벽에 기댄 나는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하는 여자 친구를 얼핏 본 것만 같다. 아침이 올 때까지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얼핏 깨어난 내 눈에 여자 친구의 자취가 밤의 여왕과 함께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펜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 한 장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다. 편지 앞장에는 눈에 좋은 음식들이 정갈한 글씨로 쭈욱 나열되어 있었고 눈 샤워하는 방법도 순서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뒷장에는 ‘걱정 뚝!!!’, 세 글자와 분홍색 색연필로 그린 커다란 하트가 박혀 있었다. 끝에 그녀의 이름 마지막 글자 恩(은혜 은)과 함께 말이다.
그녀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첫차를 타고 서울로 급히 올라간 모양이었다. 며칠 후에는 택배로 그녀가 주문한 눈에 좋은 비타민을 받았다.
의사가 선포한 6개월 동안 우리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황반변성에 좋다는 루테인이 함유된 영양제를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먹었고 세끼 밥도 함부로 거르지 않았다. 눈 샤워와 유산소 운동도 열심히 했다. 조언대로 흡연과 음주를 금했고 스트레스가 눈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말을 금언 삼아 더 많이 즐겁게 살려 했다. 스스로를, 서로를 더 보살피고 배려하며 더 깊이 사랑했다.
6개월 후 여자 친구와 나는 이전에 방문한 병원 대신 황반변성 전문병원을 함께 방문했다. 황반변성의 세계적 권위자라는 의사가 말했다.
“6개월 전 눈 상태가 어땠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6개월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지금 눈 상태는 나빠 보이지 않아요. 꾸준히 1년마다 정기검진만 꾸준히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신의 응답 같은 의사의 말에 감사함을 느낀 우리 둘은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서는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실을 나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 안았다. 두 연인은 서로의 눈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눈물을 보았다.
병원 밖을 나왔을 때 겨울 바람이 세찼다. 나는 여자 친구의 어깨를 꼭 감쌌고 그녀는 곰 발바닥처럼 크고 두꺼운 내 손을 잡았다. 둘은 거센 바람을 저항 없이 곧이곧대로 맞아가며 버스 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었다. 얼굴은 이내 추위에 빨갛게 상기되었고 두텁지 않은 외투는 바람으로부터 우리 몸을 온전히 지켜줄 수 없었다.
튀김과 떡볶이, 오뎅을 파는 노점을 지나며 여자 친구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떡볶이 1인분을 시키고 오뎅 하나씩을 입에 문 채 서로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마음껏 떠들고 웃으며 내내 행복해 했다.
“무슨 좋은 일들이라도 있으시우?”
주인 할머니가 얼굴의 주름을 한껏 인자하게 접으며 오뎅 국물을 떠 주셨다. 속에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자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따뜻함으로 우리의 언 몸을 녹여 주었다.
눈 앞에 기적이 있었다. 지금 사랑할 수 있음이 기적이다. 살아있음이 다 기적이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