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_시인 강봉숙

by THe STory lab

1분 전


강봉숙의 중간 글자 봉은 ‘봉황’할 때의 鳳을 쓴다. 여자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인생의 나락 속에서도 언젠가 자기 인생이 봉황처럼 찬란하게 비상할 거라는 희망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술집 작부, 노래방 도우미, 미용실 시다 등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무엇이든 억척스럽게 해냈다. 나이가 마흔 고개를 넘기고 아무도 모르는 남쪽에 봉봉 미용실이라는 곳을 개업했다. 동네에서 이름, 실력,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반반한 외모가 소문이 파다해질 즈음 꿈을 하나 머릿속에 되살리게 되었다.


그건 바로 학창 시절 몰래 짝사랑한 새신랑 국어 선생에 대한 연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선생이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로 문학잡지에 나오는 시들을 읽어줄 때면 오금이 저리면서 오줌이 마려워졌다. 여자는 다짐했다. 죽기 전까지 저 선생 입에서 흘러나오는 저 마술 같은 언어들로 꾸물대는 조합의 결정체-그건 바로 시였다-를 한 편 남기고 죽겠다는 바람이었다.


하루는 국어 선생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다 그 뒤를 밟은 적이 있었다. 남자 몰래 따라잡고 조우한 것은 만삭이 된 남자 아내였다. 소녀 가슴이 처음에는 죄의식으로 쿵쾅거렸다. 그러더니 배알이 뒤틀리고 용심이 생기더니 질투심이 치받아 올라왔다. 선생이 입고 있는 하얀 셔츠를 빨고 줄에 내걸고 다림질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저 둥글고 함지박만 한 뱃속에 그의 씨를 심고 싹 틔우고 키우는 여자, 조강지처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살의가 까만 두 눈에 희번덕거렸다.


다음날부터 여자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일탈을 제어할 브레이크도 없었다. 스무 살 무렵부터 화류계로 뛰어들었고 삶을 조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돈을 모아 미용 기술을 배우고 내가 주인인 미용실을 열리라. 어느덧 미스 윤이라는 스물여덟 살 먹은 시다도 두고 원장님이라는 칭호도 얻게 되었다. 가슴 속에 무언가 꿈틀거림이 다시 느껴진 건 그때쯤이었다. 때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냄비 바닥을 받치고 있던 전단지에서 중학교 때 국어 선생 이름을 봤다. 그는 도서관에서 시 창작 수업을 한다 했다. 오줌이 갑자기 마려워 오기 시작했다. 동명이인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면서도 가슴이 두근댔다. 그때 국어 선생이 시인이 되었나? 얘, 미스 윤아! 이 사람 좀 찾아봐라. 언니! 밥은 좀 먹고. 야! 내가 ‘원장님’하고 공손하게 부르라고 몇 번을 말했냐? 남 미용실 시다 사는 년이 어디서 말 대답이야? 미스 윤이 입을 삐쭉거리며 이름을 검색창에 넣었다. 언니, 아니 원장님! 이 사람 유명한 시인이라는데.


시 창작 수업 첫날, 옛 은사와 재회하고 이건 운명이다, 기적이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억지로 허벅지를 찔러대며 참았다. 국어 선생은 중학교를 중퇴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여자는 온종일 시를 생각하고 읽고 썼다. 미용실 문을 닫아걸고 휴업하는 날이 늘어갔다. 아내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그 슬픔을 이기기 위해 시인이 되었다는 사연을 듣고 나서는 시에 더욱 빠져들었다. 열심에 대답이라도 하듯 사내는 같이 수업을 수강 중인 시청 공무원 작품과 봉숙 작품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잘 썼다고 칭찬했다. 시청 공무원만 빠져도 좋았을 걸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감동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업 마지막 날 늦은 밤까지 뒤풀이 자리가 마련되었다. 하나둘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봉숙은 시인과 단둘이 남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봉숙 씨 시는 솔직해서 좋아. 시인이 술잔에 남은 술을 마지막으로 입에 털어놓고 눈을 빤히 바라봤다. 나 외로운 사람이야. 그대 시에서 나 위로 많이 받았어요. 내 후배가 이번에 문학잡지를 하나 만들었는데 거기서 등단해 보는 건 어때? 선생님도 참, 제 주제에 무슨 등단을 해요? 아니야 봉숙 씨 실력 정도면 그 잡지가 오히려 송구할 정도지. 여자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어졌다.


그날 둘은 밤을 같이 보냈다. 시인이 여자의 몸에 들어갈 찰나 봉숙이 입을 열었다. 저 선생님께 고백할 게 있어요. 으응, 그게 뭔데? 혹시 숨겨둔 남편이라도 있나?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첫 번째는 저 사실 선생님을 중학교 때 처음 뵀어요. 시인의 눈이 흔들리다 다시 안정을 찾았다. 그랬구나. 어쩐지 낯익다 싶었지. 내 제자였군. 그러면 어때? 우리 둘 다 성인이잖아. 성인이 된 이상 누구나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저 사실 처녀예요. 봉숙이 고개를 돌리고 시인이 여자 몸을 감쌌다.


1분이 지나고


시인이 말한 문학잡지 시 부문 등단작이 발표될 시간이다. 시인이 된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일었다. 시 강습회에서 늘 같이 거론되던 시청 공무원 작품이 뽑히지는 않을까. 막상 여류 시인이란 타이틀을 가지게 되면 문인 모임에도 나가야 할 텐데……. 미용실 원장이란 직업이 영 부끄럽다. 온갖 망상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할 찰나 당선작 공지라는 글이 올라왔다.


‘당선작 없음’


몇 번이나 새로 고침을 눌렀지만, 화면 속 다섯 글자는 꿈쩍하지 않는다. 이런 개잡놈의 새X. 여자는 서둘러 시인의 전화번호를 눌러댄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맴돈다. 그때 미스 윤이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를 들고 들어왔다. 원장님 요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이 계집애한테는 부끄러워 말도 못 꺼낼 사달이 터졌다. 고고한 시인 양반에게 순결을 바치고 사기를 당하다니. 우웩, 갑자기 헛구역질이 났다. 야! 그 찌개 들고 당장 나가! 웬일이래요? 김치찌개라면 환장을 하는 양반이.


은테 안경을 낀 여의사가 차트를 보다 고개를 들고 말했다. 축하합니다. 임신 4 주차에요. 나이가 있으신 만큼 조심하셔야 해요. 봉숙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다 오래전 전봇대 뒤에서 본 국어 선생과 만삭이었던 아내 모습이 떠올랐다. 당황한 빛이 역력하던 여자 얼굴에 귀기(鬼氣) 어린 미소가 순간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시인? 그 딴것 시청 공무원이나 하라지. 난 이제부터 시인의 아내란 말이다. 봉숙은 병원을 나오며 아랫배 쪽을 쓰다듬고 한 마디 내뱉었다. 이런 아름다운 새X.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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