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여행 준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부모님과는 해외여행 한 번 못해볼 수도 있겠다. 어느 여름, 유럽으로 자유여행을 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지금 갈 수 있는 가장 먼 데를 가자고. 남들 하는 거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계획을 세우면서 지인들에게 얘기하니 걱정부터 하더라. 여름에? 유럽을? 그것도 자유여행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뭐가 문제죠. '요즘 애들'이 그러하듯 나는 자유여행을 딱히 두렵지 않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당시 인도에 있던 친구를 만나러 자유여행의 성지(...)에 다녀온 적이 있고 싼 비행기가 생기거나 틈만 나면 비행기부터 끊고 보고. 가이드 물론 힘들긴 하지만 뭐 별건가 싶어 1년 동안 준비해서 출발했다. 도대체 1년 동안이나 뭘 했냐면 틈틈이 싸고 최적 루트인 항공 예약, 에어비엔비, 렌터카, 연결 기차/여객선, 레스토랑 예약, USIM을 어디서 어떻게 사야겠단 정보까지 뀄다. 루트를 어떻게 짜면 좋은지, 공항에서 시내로 어떻게 이동하는지, 시내의 대중교통 이용정보는 어떤지, 명소는 무엇이 있는지 유럽여행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유랑에서 검색해보시면 다 나옵니다...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일정은 Wishbeen으로 정리했고 티켓은 사전에 구입해야 되는 건 소쿠리패스에서 구매했다. 구글맵으로 주요 동선을 별표 찍어두고 오프라인으로 받아두었다. 동선과 숙박, 교통을 해결하는 것만도 신경 쓸 게 많았기 때문에 식당은 많이 찾아보지 않았고 Tripadvisor로 그때그때 해결했다.(앱으로 예약도 바로바로 되더라)
여행 훨씬 전부터 각자의 책임은 다한다, 간섭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걱정보단 수월했는데(부모님은 이번에 네 말 안 들으면 다음에 데려가겠냐 장난치시곤 했다) 아래는 실제로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던 순간들이다. 성공적인 자유여행을 준비하려면 미리 마음수련을 하는 게 좋겠다.
현상
피곤한데 충분히 뒹굴거리지 못함
부모님들은 왜 이렇게 부지런하실까. 여행을 떠나는 날 비행기는 점심에 예정돼있었다. 전날 밤이 되었다. 밤 내내 짐을 싸고 풀고 싸고 풀고. 결국 새벽에 깨버린데다 성수 기니 공항엔 4시간 전에 가야 된다며 서둘러 출발했다. 결국 두 시간 반 전에 수속까지 다 마쳐버리고 말았다. 비행도 긴 데 집에서 더 뒹굴거렸으면 좋았을걸..
엇나간 배려
따로 살다보니 서로의 세계가 달라진 것. 배려한답시고 하는 게 핀트가 안 맞는 경우가 있더라. 특히 뭐가 잘 안될 때. 이러면 어떠냐 저러면 어떠냐 마구 제안을 해주시는데 딱히 나는 가만있고 싶은 것. 거절하면 너 좋으라고 그러는 거지 삐치심.
예 1) 기내 앤터 테인 시스템이 고장 났다. 내 자리만. 이미 자리를 다 잡은 터라 승무원에게 말해보고 아니면 그냥 자면서 갈랬더니 자리를 바꾸자 하신다. 귀찮다- 됐다- 랬더니 너 좋으란 건데 뭐 귀찮냐며...
예 2) 폰을 비행기 모드로 돌려드려 놨더니 안쓸건데 뭐하러 그러냐며 꺼버리심
짜증이 잔뜩 섞인 수동성
여행을 하다 보면 지금 당장 무엇을 결정해야 될 순간들이 온다. 몸도 지치고 하다 보니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있지 물론. 그런데 그걸 발화하는 순간 폭탄이 된다. 특히 확신하거나 단정적이실 땐 답이 없음.
예 1) A냐 B냐 꼭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의 완고한 "난 몰라" 네 저도 몰라요. 그렇지만 뭐라도 해야 된다고요
예 2) "그게 왜 필요하냐" "그거 할 시간 없다"
예 3) (떠밀며) "물어봐봐", "메뉴 좀 네가 다 골라봐" 나 이 느낌 안다. 공부하려고 했는데 공부해라 하는 느낌.
(완벽주의자의 경우) 하기로 한 게 틀어졌을 때의 숨막힘
예) 챙겨 온 게 없어졌을 경우 마음에서 지워버리질 못함. 찾을 때까지 은근한 짜증이 스며 나온다.
매너에 대한 인식의 차이
예 1) 내가 못 참았던 것. 몸을 찌른다든지, 외국인들 외모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든지
예 2) 부모님이 못 참았던 것. 말 좀 예쁘게 할 수 없냐든지. 딴에는 일부러 구지게 한 게 아니라 요점을 짧고 명확히 전달한 거였다.
연쇄 궁시렁작용
마음에 안 드는 상황에 대해 누군가가 궁시렁거렸을 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며 짜증내고 '누가 그렇게 말했냐'며 짜증이 불어나는 현상
예) 샤워하다 바닥에 물이 흥건히 흘렀다.(유럽은 왜인지 샤워부스가 있어봤자 화장실 쪽으로 물이 잘 넘친다) 호스를 잘 조절하면 안 넘치는데 이게 왜 그렇게 됐냐
맨스플레인
(특히 아버지의 경우) 피차 서로 모르는 것, 당장 뭐라도 해야 되는데 단정형으로 거부하심. 일단 해보자고 하면 계속 아니라심. 일단 무시하고 강행하는 수밖에 없다.
예) "이쪽 방향으로도 오는 거 확실하나? 아닌거 같다. 아니다." 그런데 확인할 수 있는 방도가 없고 높은 확률로 그 방향이 맞다.
위 상황 중 뭐라도 불편해하면 후려쳐짐
괜히 그런다, 지금 삐친 거냐, 넌 역시 센 여자다
하루 일정을 마무리할 때의 폭발
저녁이 되면 체력 저하로 모두들 찌르면 터지는 폭탄이 된다. 한마디 한마디에 짜증이 묻어있는 것
처방
애초에 웬만하면 많이 움직이지 않고도 이것저것 볼 수 있는 도시를 고르세요. 유럽의 휴양도시들 괜찮습니다.
자유여행의 매력은 예산이 줄어든다는 거지만 도시의 첫째 날에는 현지 투어를 적극 이용하십시오. 저는 자전거나라 도움을 많이 받았... 첫날 전체 일정 정리도 할 겸 설명도 들을 겸 좋아요.
짜증이 생길 수 있을 상황을 미연에 방지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미리 동선을 좀 파악해온다든지.. 덤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여름의 햇살은 따갑습니다 도보+대중교통 이용으로만 이루어진 힘든 날엔 숙소에 들어온다든지 카페에 간다든지 일정 중간에 빈 시간을 무조건 확보하세요. 일정을 오전/오후 두 파트로 나누고 잠시 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구요 돈 조금(!) 더 들고 편할 수 있다면 그 길을 가십시오. 픽업 서비스, skip the line 같은 거 말이지요. 관광지는 보통 한참 기다려야 되고 그때 진이 다 빠지고 몸은 힘들고 짜증 나고 모든 사건의 원흉이 됩니다.
언제든지 하려고 했던 일정을 뺄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 욕심대로 다하는 건 너 혼자 하세요. 모두가 힘들어짐. 여행에 조금은 심드렁해진 사람이 유리하겠네요.
나의 로망이 가족의 로망과 다를 수 있어요. 큰 맘먹고 야경 보러 나왔는데 빨리 가자고 한다든지. 저걸 꼭 봐야겠는데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으시다든지. 초연해지세요. 혼자만의 여행이 아닙니다.
역할을 나누세요. 혼자 모든 걸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지폐 담당, 동전 담당 역할을 나눠드림
비타민, 마사지볼, 팩 등 유용합니다. 일정 중의 근사한 식사, 깨끗한 숙소 매우 중요하고요.
나 혼자 쓰는 침대, 잠깐의 산책 등 나만의 시간을 짬짬이 확보라세요.
프롤로그
혹시 디어 마이프랜드 보셨는지. 고현정은 엄마와 엄마의 친구들을 꼰대라고 부르지만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사건건 부딪히고 짜증내곤 하지요. 위에 나열한 유형은 평소에 가족을 잘 살펴보면 미리 알 수 있을 것들입니다. 그 갈등의 씨앗이 여행에서만 운 좋게 피해간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여행은 사진만 찍는 정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이동하고 기다리고 몸은 힘들고 불안하고. 무조건 터지게 되어있어요. 평소에 건강하게 관계를 가꿔나가는 연습을 하고 떠나세요. 같지 살지 않는다구요? 저도요. 가끔 집에 방문할 때나 메시지를 보낼 때에도 알 수 있잖아요. 피하지 말고 나름의 방법으로 조율해나가려는 연습을 해둬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풍경도 좋은 마음으로 함께 누릴 수 있지요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니 좋았던 점도 많았는데, 가족 간에 몰랐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게 그 중 하나. 비행기 엔터테인 시스템으로 보고 싶었던 <비거 스플래쉬>를 골랐는데 한참 뒤에 슬쩍 보니 엄마도 같은 걸 보고 있으시더라고요. 사진을 찍었는데 똑같이 생겼다든지...
언제까지나 날 지켜주기만 할 것 같은 부모님이 이제 커피 하나 살 때도 옆에 있어달라 하고 나보고 이거 저거 물어보라 시키실 때는 짠하기도 했습니다. 다 크고 나서는 부모님과 긴 시간을 같은 목적을 두고 시간을 보낼 일이 없었는데 두 분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었고 나이가 많이 드셨구나 싶기도 하고.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만족도가 높으시더라구요. 다음 여행도 준비해야 되게 생겼... 이 글은 다음 여행을 준비하게 된다면 다시 참고해야겠어요. 충분히 좋은 여행이었지만 그땐 좀 더 좋은 여행을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덧. 아이즈의 아티클도 참고해보세요. 사람 맘 다 똑같...
조금 뒤에서 바라보면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