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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속도 Nov 18. 2016

나를 위한 살림법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기숙사, 친척 집, 하숙, 그리고 자취. 온갖 주거형태를 거치면서 자취가 가장 만족도가 높았다. 그 이유는 살림이었다. 가끔은 슬럼프에 빠져 아노미 상태에 이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온전히 나만을 위한 살림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식재료를 팍팍 넣어 음식을 만들어 냉장고에 쌓아 놓고, 남은 재료로 다음 요리를 기획(!)하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풍족해진다. 오늘은 파를 한단 샀더니 너무 많은 거다. 편의점에 무 반통은 팔아도 파 한 개는 팔지 않는다. 그래서 원랜 양파로 만들어야 하지만 파로 베사멜 소스를 만들어 그라탕을 했다. 남은 소스는 다음에 맥앤치즈를 하려고 넣어두었다. 남은 파로는 엄마가 준 김치가 시었으니 볶아놓고 볶음밥, 찌개, 두부김치로 먹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오늘 한 갓김치 지짐이랑 밥이랑 야매 감동란을 섞어 볶음밥을 도시락으로 챙겨가야지.

옷도 정리했다. 애매하거나 불편해 1년 이상 거들떠도 보지 않은 옷은 다 상자에 담았다. 안 쓰는 것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건 곧 옷캔에 기부할 것이다. 부엌도 정리한다. 처박아두었던 모카포트를 다시 꺼내 한번 헹군 후 불에 굽는다. 모카포트는 습기에 쥐약이기 때문이다. 콜렌더를 사서 싱크대에 넣었다. 부엌이 좁아 식재료를 씻어 마땅히 둘 데가 없었는데 요리 동선에 딱이다.

좋아하는 부엌 살림살이 중의 하나, 모카포트.

생활의 잔 짜증은 내 동선에 필요한 것이 알맞은 높이에 없을 때 일어난다. 택배를 뜯어야 되는데 칼이 방 저쪽 구석에 있다든지, 지나다니는 길에 책상이 떡하니 놓여있다든지 식재료를 다듬어야 되는데 너무 좁아 저쪽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서 일해야 된다든지. 집의 얼마 없는 가구와 도구들을 최적화해서 배치해보고 필요한 건 이케아에서 보충했다. 살림용품은 잊을만하면 아이허브에서 산다. 나에게 맞는 간단한 영양제, 세제, 식재료, 향초, 향 등을 하나씩 장바구니에 넣다 보면 행복해진다.

나를 위한 살림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즐겁다. 내 취향대로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자유롭고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의 (아직까지는) 주 살림자인 엄마들은 어느 순간 나를 빼고 옆사람만 챙기다 보니 나도 즐거움도 잃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갓난아이를 키우는 친구를 보았는데 아기랑 똑같이 자고 일어나야 되니 본인 리듬에 맞출 수 없더라. 몸이 부서질 것 같아도 안아달라고 칭얼대는 내 자식을 어떻게 내버려둬... 양육자가 둘이라면 짬짬이라도 나눠서 하면 살림에서 나를 소외시키지 않을 수 있고, 충분히 에너지를 모으고 그걸로 뭔갈 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고무장갑을 끼고 오븐장갑을 낀 뿌듯한 표정의 전사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올핸 유난히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이 많았는데 특히 나는 슬럼프에 빠졌을 때에도 요리를 하면서 힘을 내는 것 같다. 어쩐 식재료를 살지, 집에 뭐가 남았는지, 지금 뭐가 당기는지 등등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는 건 꽤 생산적이고 보람찬 일이다. 언젠간 요리 클래스도 다녀보고 싶다. 해외여행에서 해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치앙마이 요리 클래스가 그렇게 좋다는데... 일단 지금은 블로그(홈 퀴진, 실험식탁, 찰리네 다양한 생활, NYT Cooking 등)를 참고하는 걸 좋아한다. 워낙 가성비형 인간이어서...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팁도 공유 받고 레벨업(!)하는 기운을 느껴보고 싶기도 하다. 내 삶을 돌보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노력하고, 삶의 기술을 연마하는 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운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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