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애들이 인형놀이를 하는 건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그 시절 특유의 감각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형놀이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훼손하지 않고 이에 아주 잘 부응한다. 극의 모든 요소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관객은 나 하나이기에 어떠한 결말로 나아가도 내게 항의할 이는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아이는 스스로를 관객으로 하는 일인극을 하지 않게 된다. 나 자신만의 만족만으로는 불충분한 그 시점이 다가오며 성장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내가 모든 걸 설정하고 구성하며 운명을 부여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인생에 나와 무관한 타인들을 등장시켜야 하고 언제나 이들의 맥락 없음에 당황한다. 유일하게 예견된 결말이라곤 각자의 세계가 충돌하리라는 사실뿐이다. 더불어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파편인지는 아무도 모르리라는 것. 딱 그 정도.
이렇게 성장 이후의 자의식이라는 것은 실제로 타의식에 가깝다. 사랑은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깊은 실망으로 끝난다. 원망은 궁극적으로 나를 향하는 감정이다. 그들이 내 뜻을 따르지 않는 데 서운함을 느끼는 스스로에 당황한다.
그래, 너에게도 너만의 고충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하지만 나도 그만큼 너에게 많이 해주잖아.
속상함이 아니라 정확하게 서운함이다. 사랑할 때조차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이렇게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정말 쓰레기 같다고 느끼고 또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대체 왜 이렇게 쓰레기 같은 결말로 치닫는 건지 회의감에 사로잡힌다.
모든 걸 그만두면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쓰레기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럴 수 없는 건 성장의 분기점이 되는 바로 그 타의식 때문이다. 유아기적인 나만의 왕국에서 벗어난 이상 불완전한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자기만족이니 충족감이니 같은 말을 주워삼기며 더욱 아닌 척 하는 거다.
성장한 이들은 이미 유아기의 왕국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지니는 것은, 아직 인형극에 머물러 있는 유아기의 습관이다. 많은 마음을 얻는 만큼 존중할 것. 좋아하는 마음이 내게 모든 걸 맞춰주길 바라는 욕심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할 것. 그들이 준 행복하고 벅찬 순간들이 절대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인식할 것. 그냥 고맙기만 하기에도 아쉬울 시간들이다.
연말에는 모임이 많았다. 한 해가 끝나간다는 것을 핑계 삼아 다 같이 모여드는 시간들. 나는 사실 빽빽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이리저리 튕기며 발생하는 텐션을 즐기는 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확실히 텐션을 좋아한다. 어색함과 서먹함, 불편함 같은 감정을 은근히 즐기는 이상한 취미가 있다. 이러한 감정들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서 발생하지만 이는 곧 가능성이고 설렘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팽팽한 기운을 느끼니 요즈음 내가 왜 삶에 어떠한 의욕도 느끼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지 알 것 같았다. 이미 너무 잘 아는 사람들하고만 엇비슷한 일과를 되풀이해서였다. 내가 요즘 피곤했던 건 익숙함에 의한 질식 상태에 가까웠지 결코 지쳐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이야기들을 꾸역꾸역 주입받고 또 쏟아내니 금세 피곤해졌다. 마음속에 그들에 대한 편향된 평가가 둥둥 떠다니기 시작하고... 실은 나도 안다. 내가 불편한 건 언제나 나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솔직하지 못해서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나의 전부를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자꾸 포장하고 여과해서 보여주려 해서다. 그래서 자꾸만 안정되지 못하고 혼자서 스스로와 전쟁을 일으키느라 분주한 거다. 나는 왜 이런 걸까? 왜 항상 아둥바둥 나와 싸우게 되는 걸까?
이건 분명히 나의 트라우마다. 어느 날 갑자기 인형극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왜 평생 가는 건지, 나에겐 나를 잘 위장하지 않으면 결코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타의식이 있다. 부모님 탓을 하고 싶진 않다. 그들의 양육이 언제나 나를 좋은 쪽으로 밀어주지는 않았다는 건 확실하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내게 주어진 상황에 마냥 억울해 했던 건 분명 내가 쓴 나의 각본이었다.
물론 외부세계가 실제로 나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기는 했다.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사정, 뒤숭숭한 분위기에 희생당한 성적, 갑자기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과 점점 살쪄가는 몸을 끌어안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시의 내게는 재앙이었다. 그때 나는 도무지 스스로의 현재로 나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만족하기는커녕 인정하기조차 힘들었다. 나는 예쁘고 똑똑한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실제의 나는 장면의 귀퉁이에도 등장할 수 없는(등장해선 안 되는) 흉물 같았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상대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감히 나와 어울리길 바라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그 타의식으로 내 몸을 몇 겹이나 칭칭 감아야 했고, 그렇게 타인의 시선에 마구잡이로 노출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나는 평범하다는 것도 칭찬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성인이 되어 다방면의 노력으로 비로소 외모와 능력에 대한 칭찬을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니 오히려 더 자유가 박탈된 듯하다. 위장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갑자기 이 모든 게 사라지면(당장 일주일 후부터라도 가능하다. 어쩌면 목전에 다가왔을 수도 있다. 늘 그렇듯 나만 모를 뿐) 나를 둘러싼 타의식이 무너질 것이라는 공포.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나의 본체가 되어버린, 속이 텅 빈 소재로 지어진 부실한 성벽.
그러니 나는 약간의 진동에도, 균열에도, 사소한 위협에도 벌벌 떤다. 자족의 환상이 무너지고 말소리 하나에도 쿵―울리는 벽에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보수하는 데 쏟는 내가 남는다.
차라리 성벽을 무너뜨리는 게 낫지 않을까?
다이너마이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