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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대리 Jun 26. 2019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뭘 해도 안되고 이상한 사람들과 엮여 감정이 상하는 그런 날.

처리하는 업무마다 힘이 들고 일이 또 다른 일을 물고 와 더 지치게 하는 그런 날.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어제 후배가 해놓은 실수를 복구하기 위해 전산에 똑같은 화면을 수없이 눌렀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솔직히 그냥 모른척하고 싶었다.

누구도 나에게 후배의 일을 거들라고 한 사람도 없었고 솔직히 눈치도 없고 실수만 반복하는 후배가 미워 모른척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어제 남편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 밤늦게까지 켜진 사무실 불빛을 보고 괜한 연민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결국 후배의 짐을 나눠 들었다.


그렇지만 그 짐을 처리하는 내내 나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했다.

가뜩이나 일도, 마주치는 사람도 싫은 요즘, 회사에서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이를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업무시간의 반 가까이를 그 짐을 처리하는데 투자했고 결국 그 짐은 다 처리하지 못한 상태로 다시 내일로 넘겨졌다.



- 빨리 퇴근해서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무렵 사건은 또 터지고야 말았다.

며칠 전 업무를 처리하다 사정이 있어 처리를 해주지 못한 민원인이 전화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사정이 우리 회사의 업무처리기준에는 합리적이지 못한 기준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나에게 인정을 바라고 이해를 바란다고 해도 난 일개 직원일 뿐이고 내도장이 그곳에 찍혀야 하는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상황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한 고생과 억울함만 계속해서 얘기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설전이 오고 가던 중에 그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 지금 제가 목소리 높인다고 그쪽도 목소리 높이시는 거예요?!


그 소리에 나는 헛웃음이 났다.


너만 되고 나는 안되는 거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너도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온갖 진상 손님들을 다  겪었을 거면서 왜 나에게는 너의 기분을 맞추라고 강요하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소리를 내뱉는 순간 통화는 길어질 뿐이고

나의 퇴근시간은 늦어질 뿐이었다.


결국 내일 당장 찾아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어쩜 그녀는 나와의 통화를 끊고 다른 누군가에게 사정을 봐주지 않는 우리 회사와 그녀와 함께 목소리를 높였던 싹수없는 여직원인 나의 험담을 늘어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녀와의 전화를 끝으로 퇴근을 했고 어쩜 내일 그녀와 다시 2차전을 할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이 한 번씩 있을 때마다  씩씩거리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을 텐데 회사와 업무, 그리고 업무를 통해서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질릴 대로 질려버린 나는 그냥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참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겠지만 그것도 그냥 사회생활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면 될 일이었다


결국 나는 퇴근을 하면서 김대리에게 이렇게 문자를 남겼다.



"이럴 때는 회사에 정이 떨어진 게 다행인 것 같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니까 이런 일들도 신경 쓰이지 않잖아."







사실 며칠 전까지 나는 브런치에 이런 제목의 글을 남기려 했었다.


- 이런 마음으로 일해도 괜찮은 건가요?!


맡은 업무를 누군가에게 떠넘기거나 다른 직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명 영혼을 집에 둔 것 같은 자세로  아무런 감정 없이 일하는 게 정말 맞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회사에서의 나의 감정은 이러했다.


특히 의욕, 열정, 흥미, 기쁨처럼 긍정적인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분노, 짜증, 귀찮음 등의 감정들만을 남긴 상태로 업무를 보는 것이 매달 월급을 받는 회사의 직원으로서 괜찮은 것인가에 대한 나만의 고찰이었다.


그런데 오늘 같은 일을 겪고 나니 괜찮은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그런 감정들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점 자체는 나에게 매우 안 좋은 상태겠지만, 회사의 입장에서는 열의를 가지고 일하면서도 업무처리가 미숙한 직원보다는 나같이 열의는 없더라도 그럭저럭 맡은 일은 해내는 직원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생각이 틀린 걸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다.

내일의 나도 그럴 것 같은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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