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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대리 Mar 01. 2020

그건.. 아마도 화병이었을 것이다


화병(火病) 또는 울화병(鬱火病, 영어: somatization disorder): 한국에서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못하고 참는 일이 반복되어 발생하는 일종의 스트레스성  신체화 장애를 일컫는 말.


화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 건 몇 달 전부터서였다.


흔히 드라마 속에서 머리에 끈을 질끈 동여맨 중년 여배우가 가슴을 치며 얘기했던 그 화병이라는 단어가 이제 막 서른 중반을 넘어서는 나에게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떠오르게 될지는 이전까지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회사라는 곳에서 내가 이리도 화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될 줄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증상은 단순했다.


갑자기 출근을 해서 업무를 시작하려는 순간 또는 업무에 본격적으로 집중하려는 순간이면 이따금씩 속에서 울컥울컥 뜨거운 것들이 올라와 두드리던 키보드를 멈추게 만들었다.


그저 일을 하고 있을 뿐..

팀 내에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하거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나도 모르게 지난 11년간의 회사생활들이 스치듯 떠오르면서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동안 열심히 일하지 못한 것이나 불성실했던 일 아님 미워할 만큼 나를 분노케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증상이 덜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지각도 불성실함도 없이 묵묵하게 열심히 일해온 시간들만이 떠올라 마음속에 분노가 차오르고 답답함이 밀려왔다.


신입시절 제대로 인수인계도 받지 못한 일을 해내느라 지하철 막차를 타고 퇴근했던 시간들.

과중한 업무를 어떻게든 줄여보겠다고 동동거리며 주말에도 회사에 나왔었던 시간들.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민원이 발생할까 봐 가슴 졸이며 불안했던 시간 등등..


그 모든 순간들이 훈장처럼 느껴지기보다는 미련하게만 느껴져 가슴을 치게 만들었다.


이렇게 인정도 받지 못할 거였다면..

이렇게 그렇다 할 이유도 듣지 못한 채 승진에서 밀리게 될 거였다면 그렇게까지 나를 혹사시켜가면서까지 애쓰지 말 걸이라는 후회가 밀려와 화병처럼 가슴을 뜨겁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 화병인가 봐.

요즘 일하다가도 갑자기 가슴이 먹먹하면서 답답하고 막 울컥울컥 뭔가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어."


회사 내에서 유일하게 내 심정을 알고 있는 김대리에게 하소연을 해보자 김대리가 놀란 말투로 되묻는다.


"진짜? 최대리가 그런 게 있었어?

늘 말을 안 해서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원래 이렇게 말 안 하고 쌓아놓는 사람이 한 번에 폭발하는 거잖어."


사내 메신저로 킥킥거리며 농담 반 진담 반의 대화를 이어가지만 나도 이렇게까지 뒤끝이 긴 사람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고 언젠가는 나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고 믿으면 되는데 그걸 못하고 이리도 화병을 키우고 있으니 어쩜 이렇게도 딱한지 모르겠다.


화병같은거

진짜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진짜 쿨하게 누구보다도 쿨하게 넘기고 싶었다.


"승진같은거에 연연해하지마.

기다리면 언젠가는 기회가 와.

그리고 그런거 못했다고 사람들에게 티내고 그러는게 젤 꼴불견인거 알지?"


개뿔..

남일이라고 함부러 얘기하는 그들에게 속시원하게 말하고 싶다.


"쿨하지 못햐게 만들어놓고 인정못할 기준을 만들어놓고 티내지도 말고 연연해하지도 말라고?!

웃기고들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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