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속도에 맞추다가는 내 가랑이 찢어진다
죽는다는게 이런거구나 싶었던 하루. 지금 살아서 일기를 쓰고 있다는게 감격스럽다.
여기와서 알게된 사실인데 나는 매우 느리게 걷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키만한 짐을 지고서도 어쩜 그렇게 성큼성큼 잘 걷는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에비해 나는 가장 먼저 출발해도 가장 늦게 도착하는, 이른바 "슬로우 워커"였다. 나는 덴마크 할머니보다도, 영국 꼬맹이보다도 느리다.
느린 사람이 주위사람의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서는 좀 더 부지런해야한다. 오늘은 그래서 다섯시부터 일어나 나갈 준비를 마친 다음 여섯시에 짐을챙겨 곧바로 일정을 시작했다. 함께 길을나선 한국인 아저씨는 걸음이 매우 빨랐는데 초반의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아저씨와 함께 잘 헤쳐나갔다.
순탄하게 쭉쭉 걷다가 이후 아저씨와 헤어지고나서부터 다리에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걷기 쉬운 평지였고 함께걷는 아저씨가 있어서 템포를 빨리 올렸던게 화근이었다. 남들보다 한시간이나 먼저 나섰지만 다들 쌩쌩 나를 지나갔다. "Are you OK?"를 덧붙이며.
무의식중에 나는 남들과 같은 일정을 소화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것을 깨달았다. 남들은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하루에 넘는데, 나는 이틀을 소비했으니 오늘은 절대 뒤쳐지면 안 된다는 마음이 나를 아프게 했다. 내 템포가 아닌 다른사람의 템포를 따라가려 흉내내다 가랑이가 찢어진 셈이다. 걷는 길 옆으로 차도가 보일때면 차도로 뛰어들어 아무 차나 잡아 타고 싶었다.
그러나 잡아탈 수 있을만큼 스페인어를 잘하는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나가는 차가 한대도 없어서 계속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나 여기 왜 있지, 돌아갈까를 수십번 생각했다. 몸이 축나는 것이 느껴졌다.
수비리에 도착하니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는 동네 축제기간이라고 문을 닫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어서 빨리 다른 숙소를 찾아나섰고 근처의 사설 알베르게에 줄을 섰다. 아침에 일찍나서고 초반 페이스를 빠르게 올린 덕에 다행히 많이 뒤쳐져있진 않았다. 체크인을 기다리는 줄에서 오리손 산장에서 만났던 덴마크 할머니와 스페인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다시만나자는 기약이 없어도 순례길에서는 이렇게 우연처럼 다시 마주치게 되어있다.
내차례에 체크인을 하려고 여권을 건네는데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식은땀이 잔뜩 났다. 긴장이 풀려서인가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을 뻔 했다. 직원이 안색이 좋지않음을 발견하고 잠시 앉아있으라고 급하게 나를 안내했다. 물 한잔 마시고 부채질 하고 있으니 그제서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중학교 2학년때 조회시간에 서있다가 쓰러질뻔 했던 그때의 기분 그대로였다. 기운이 허약해지긴 했나보다.
배정받은 침대에 누워 식은땀을 흘리며 잠시 잠을 잤다. 몸이 으슬으슬 추운 것이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이 동네 축제라는데 나는 내 몸을 축내면서 걸어오느라 동네에는 일찍 도착했지만 정작 축제를 즐길 여유도 없었다. 페이스 조절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던 하루였다. 내일은 좀 더 몸이 괜찮아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