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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걷는길 (10) 로스 아르코스에서 산솔까지

이유도 모른 채 우울해하던 중 뜻밖의 위로를 받다

by 신아영

로스 아르코스 Los arcos - 산솔 Sansol 8km



오늘은 정말 걷기 싫은 날이다. 걸어야 할 이유는 뾰족하게 없으면서 걷기 싫은 핑계는 수십 가지를 찾을 수 있다. 무리하면 안 되서, 발목에 무리가 가서,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냥 쉬고 싶어서.

새벽녘의 로스 아르코스 대성당. 안녕.

로스 아르코스 알베르게에서 부실하게 아침을 차려먹고 두어 시간을 걸어 산솔에 도착했다. 산솔은 큰 마을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게 동네가 예뻤다. 단 하나밖에 없는 알베르게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원래는 비아나 Viana 라는 마을까지 걸어야지, 하고 다짐했던 하루였다. 그러나 왼쪽 발목이 아파오면서 슬 짜증도 나고 걷기가 싫어졌다. 여기서 그냥 하루 쉴까 발목도 아픈데. 아냐 그래도 좀 더 걸어야지. 두 가지 마음이 충돌하다 결국 쉬자는 마음이 이겼다. 남들보다 훨씬 이른시각에 알베르게에 체크인한 후 침대에 뻗어버렸다. 그리고는 깊은 잠에 빠졌다.

숙소 창가에서 바라본 산솔 마을

어제 저녁에 깊이 잠들지 못해서였을까. 오전부터 엄청 깊게 잠들었다. 그리곤 일어나서 여느때처럼 빨래를 하고 샤워를 했다. 그렇게 일과를 일찍 마치고 침대 위에서 쉬다가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졌다.


이러다가 우울증까지 걸리는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큰 돈 들여 스페인까지 왔는데 왜 내 상태는 이모양일까. 한국의 친구들이 보고싶다.

여기에 와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이슈 중 하나는 인간관계다. 모든 관계는 피상적이니, 추상적이니 하는 말들을 집어치우고서라도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말에만 집중한다.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몇 번 친구들에게 카톡했는데 각자의 삶이 바쁜 친구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어보였다. 다시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나는 내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왜 내겐 아무도 관심이 없을까.

팜플로냐에서 느꼈던 외로움처럼 오늘의 감정도 비슷하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많지만 친구는 없고, 수많은 연락들이 오고가지만 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무언가 쏟아내지 못한 감정들이 쌓여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한 타이밍에 스페인 친구 멜리사에게 메일이 왔다. 별 것 아닌 문장들이었는데 괜시리 마음이 찡해져서 나도 모르게 조금 울었다. 유아 낫 얼론, 너는 혼자가 아니야. 이런 상투적인 문장에 감동할 줄이야.

멜리사에게 받은 뜻밖의 편지.


인연은 타이밍이라고 하던가. 작고 아기자기하기로 유명한 산솔 마을에서 생전 알지도 못하던 스페인 친구 때문에 감동할 줄은 세상 꿈에도 몰랐다. 나라는 존재에 관심 가져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다 알베르게에서 루마니아 친구를 만났다. 이름은 라모네. 곧 알베르게 앞 슈퍼가 문을 닫으니 얼른 가서 필요한 것을 사라는 친절한 조언을 해줬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침대에서 나와 바깥을 산책했다. 이렇게 햇살도 좋고 나를 걱정해주는 이들도 많고 아팠던 발목도 조금 나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산솔까지 오던 중 찍은 사진.

산솔까지의 걸음 여정은 짧았지만 마음의 여정은 큰 절망과 위로를 동시에 경험한 하루였다. 가끔은 이렇게 극도로 외로워지는 내 자신까지도 '나'임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 힘을 받았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나도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기원하며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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