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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걷는길 (11) 산솔에서 로그로뇨까지

준비부터 걷기, 도착까지 완벽한 하루

by 신아영

산솔 Sansol - 로그로뇨 Logrono 22km



몸과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어제 푹 쉰 시간만큼 발목은 회복되어 있었다. 많이 걸은 날과 적게 걸은 날의 피로도는 딱 걸은 만큼 차이가 난다. 반대로 매일 걷는 거리만큼 몸에도 내성이 생겨 걷는 일 자체는 좀 더 수월해지고 있다.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걷다가는 금세 지치고 힘들 뿐더러 얼굴과 팔,다리가 까맣게 타버릴게 뻔하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아침 일과를 일찍 시작한다. 보통은 다섯시 반~여섯시 사이에 일어나 간단히 세수하고 양치질 하고 통풍 잘 되는 걷기용 옷으로 갈아입는다. 얼굴에는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물집이 잡히지 않도록 바세린을 듬뿍 바른다. 발가락 양말을 신고 그 위에 등산양말을 한겹 더 신으면 얼추 준비가 끝난다.

여기 오기 전 물집방지로는 바세린이 짱이라는 조언을 들었는데 정말이다. 나는 조금만 걸어도 발에 물집이 잡히는 스타일인데 아직까지는 바세린 덕에 물집이 잡히지 않았다.

새벽에 길을나서면 이런황홀한 풍경을 매일 본다

복숭아 두 알을 먹으며 오늘의 까미노를 시작했다. 오늘의 목표는 로그로뇨. 이렇게 목표를 잡으면 항상 실패했었는데 과연 오늘은 걸을 수 있을지?

오늘은 햇살이 따갑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나왔다. 아마 한시가 넘어가면 도저히 걸을 수 없는 날씨가 될거다. 아침 일찍 나왔으니 부지런히 걷자, 생각하다 어설프게 길을 잘못들었다. 다행히도 잘못 든 것을 곧바로 알아차려 금방 다시 복귀할 수 있었지만 괜히 나를 자책하게 된다. 역시 마음만 급하면 되는 일이 없다.

피레네 산맥 이후부터는 대체로 평지가 펼쳐진다.

피레네 산맥을 완전히 지나버린 후부터는 계속해서 넓은 평지가 펼쳐지고 있다. 특히 눈에 많이 들어오는건 포도밭이다. 나는 포도나무가 정말 이렇게나 키가 작은줄은 몰랐다. 나보다 키가 작은 나무가 존재한다니, 그것도 아주 성실하게 열매를 맺어대다니. 자연의 경이로움은 끝이 없다.

키가 정말 작은 포도나무. 앞으로 누가 젤 좋아하는 나무가 뭐냐고 묻거든 포도나무라 답하겠다.

어제 푹 쉬었던 빚을 갚기 위해서인지 걷는 템포가 나도 모르게 빨라지고 있었다. 무리하진 않되 빠르게 걷는 속도감을 즐기고 있었다. 한 세시간여 걸었을까. 작은 마을 하나가 나타났고 아침을 파는 Bar가 보여서 무작정 자리잡고 아침 메뉴를 시켰다. 커피와 오렌지주스 중 하나를 고르는 걸줄 알았는데 두개 다 나오다니 문화충격.

오늘의 이침


이정도 페이스라면 무난하게 로그로뇨에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다. 걸음이 잘 걸어지니 마음마저 가벼운 까미노 길이었다. 세시간 걷고 아침 먹고, 다시 세시간 정도 걸어 열두시 반 쯤 로그로뇨에 입성했다. 목표한 만큼 걷지 못해도 괜찮지만, 목표치를 달성했을 때 자축할만한 에너지가 남아있다는건 그 자체로 또 다른 차원의 기쁨이었다.

대도시 로그로뇨 입성

로그로뇨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길을 숙지한 다음 걸으니 무니시팔 알베르게까지도 잘 도착했다. 한 시에 오픈하는 알베르게였는데 내가 여섯번째라고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등수를 매겨주었다. 출발 준비부터 걷는 과정, 아침 식사, 로그로뇨 입성, 알베르게 도착까지 기/승/전/결 모든게 완벽한 하루였다! 이런 날이 또 있을까.

짐을 풀고 옆 침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로그로뇨는 타파스로 유명한 도시다. 타파스는 한 입거리 음식을 생각하면 되는데 간단히 Bar에 서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로그로뇨의 타파스 가게들은 각자 시그니쳐 메뉴가 있는데 예를들면 어떤 가게는 버섯 타파스가 유명하고 어떤 곳은 연어 타파스가 유명한 식이다.

타파스 가게에선 한 입거리 음식을 취향대로 시켜먹을 수 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하고 달려간 타파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순간 명동 한복판에 온 줄 알았다. 인파를 뚫고 가장 유명하다는 가게를 찾아 갔는데 아쉽게도 휴무였다. 아쉬운대로 근처 타파스 가게로 들어가 맛있어보이는 타파스 몇 개와 와인 한 잔을 주문해 맛보았다. 맛은 있었으나 사람이 워낙 많아서 급하게 먹고 바로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와인한잔, 연어타파스 하나에 3.8유로

순례길을 걷다 이렇게 관광객 모드로 전환하면 사람이 바글바글 많은 곳에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십상이다. 적당히 즐겼으니 이제 다시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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