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작은 걸음들이 모여 목적지까지
로그로뇨는 까미노 중 만났던 동네 중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처음 만났던 대도시는 팜플로냐, 그리고 이번에 입성한 로그로뇨. 계속 나바라 주를 걷다가 라 리오하 주 지방으로 넘어왔는데 이 지역은 특히 와인으로 유명하다. 마트에 가면 2유로 짜리 와인이 널려있는데 맛까지 최상이다. 순례길을 걷는 중이니 폭음까지는 못해도 식사 때 맛있는 와인 한잔을 곁들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로그로뇨에 더 머물면서 다양한 와인을 맛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걷고싶은 마음도 생겼다. 여느 여행같으면 "오늘 뭐하지?" 하는 고민이 있었겠지만 이 곳 까미노에선 그런 고민할 틈 없이 아침 일찍 나도모르게 준비하고 걸을 채비를 하게 된다. 그렇게 결국 오늘도 오늘의 까미노를 시작했다.
큰 도시답게 도시를 빠져나오는 데만 4~5km 가량 걸었다. 잘 꾸며놓은 공원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이 엄청 가고 싶어졌다. 이러다 길에서 해결(?!) 해야하나 싶을 때 이 곳이 공원임을 깨닫고는 공공화장실을 찾기 시작했다. 이리 저리 둘러봐도 화장실이 없어서 엄청난 좌절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내 눈에 들어온 화장실. 볼일을 해결하고 나오니 세상이 천국처럼 보였다. 역시 행복은 멀리있지 않다.. ㅋㅋ
까미노를 걷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슉슉 지나가는데 내가 빠르게 걷고 있어도 이는 마찬가지다. 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는데, 살펴보니 이는 신장의 차이에 기인하고 있었다. 나는 걸음도 느릴 뿐더러 키도 작아서 자연스레 보폭도 짧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리가 쭉쭉 긴 사람들은 굳이 빠르게 걷지 않아도 적은 걸음 수로 더 많은 거리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폰 "건강"기능은 꽤 정확하게 나의 걸음 수와 걸은 거리를 측정해주는데 이번에 살펴보니 난 40,000걸음을 걸으면 25km 정도를 걷는다. 물론 나의 보폭은 매우 짧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다를 수 있다. 매일 달라지는 걸음 수를 살펴보며 까미노를 진행하는 것 역시 소소한 재미다.
열심히 걷다보니 나바레떼 Navarette 에 도착했다. 살펴보니 약 15km정도 걸어왔고, 다음 마을인 벤토사 Ventosa 까지는 7km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만 쉴까, 더 걸을까 고민하다 우선 Bar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 곳에서는 더 걸을지, 여기서 쉴 지에 대한 결정이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 누가 쉰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더 걷는다고 칭찬해 주는것도 아니다. 그저 본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대로 더 걸어도 되고, 쉬어도 상관없다. 그리고 오늘은 아침을 먹고 나도 모르게 다음 마을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나바레떼는 축제 중이었고 마을도 생각보다 커서 머물다 가면 좋겠다 싶었는데 왜 조금 더 걷겠다고 결정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조금만 더, 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조금만 더, 다시 걷기 시작하자마자 펼쳐진 햇살에 불현듯 짜증이 치솟았다. 왜 더 걸으려고 했지, 그냥 나바레떼에서 하루 쉴 걸. 그러나 이미 후회하기엔 늦었다. 열심히 걸어 다음 마을까지 도착해야만 쉴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길 위에서 한글로 된 낙서들도 만나고, 까미노 여정 중 처음으로 멕시코 사람도 만났다. 걸음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는 나를 보고 힘 내라고 격려해 주던 멋진 아저씨. 오늘따라 자전거족들은 왜 그렇게도 많던지 흙먼지 만들며 지나가는 자전거들이 원망스러웠다.
끝이 보이지않던 길에도 결국 끝은 있다. 결국 벤토사 Ventosa 마을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조금만 더, 하며 걸었던 작은 걸음들이 나를 이 마을까지 이끌었다. 남들에겐 별것 아닌 22km의 여정이지만 내겐 어느날보다도 값진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