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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걷는길 (13) 벤토사에서 나헤라까지

타지에서 홀로 생일을 보내다

by 신아영

벤토사 Ventosa - 나헤라 Najera 11km



8/16.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타지에서 처음 맞는 나의 생일. 매번 주위 사람들로부터 시끌벅적 축하를 받아오다 이번에는 온전히 홀로 보내는 날이었다.

한국의 친구들은 잊지않고 축하해주었다.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곳 까미노에서도 소소한 이벤트(?) 들이 있었다.

먼저, 속옷이 사라졌다. 맙소사. 아침에 옷을 갈아입으려 보는데 챙겨왔던 속옷 2벌 중 한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전 마을에서 빨래를 널고 걷을때 놓친 것 같다.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속옷도 딱 두벌만 가져왔는데 좌절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여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생리 기간이 시작되었다. 사실 까미노 기간이 한달 넘게 지속되는지라 일부 여자들은 피임약으로 주기 조절까지 하는 모습을 봤다. 자연스레 찾아온 생리통으로 인해 오늘은 조금만 걷고 생일 기념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생일이어도 걷는다, 부엔 까미노!

오늘의 목표 목적지는 나헤라 Najera. 11km만 걸어가면 되는 도시라 크게 부담감은 없었다. 벤토사에서 만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자매 제인과 도로시와 함께 걸었다.

제인은 동생, 도로시는 언니였는데 쾌활하고 활발한 동생 제인에 비해 언니 도로시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외국인 친구들도 이렇게 성격이 제각각인 것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 나라나 사람 사는게 다 똑같구나 싶었다.

문득 생각나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말했더니 둘은 정말 크게 놀랐다. 그리고 즉석에서 노래를 엄청 엄청 크게 불러줬다. 모래길 밟으며 호주 친구들로부터 생일축하 노래를 선물받은 순간의 기억은 꽤 강렬하다. 자신들과 함께 다음 동네로 걸어가서 생일파티를 하자고 했지만 몸 상태가 받쳐주질 않았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배터리가 다 되어서 사진 한장도 찍지 못했다. 아쉽고 아쉬운 작별인사.

나헤라 입성

나헤라에 도착해 오늘은 좀 더 편하게 쉬기 위해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보통 알베르게는 5유로에서 10유로 사이의 금액이고, 호스텔은 35~40유로 사이면 좋은 방을 구할 수 있다. 비록 도미토리 생활이지만 숙소 비용이 적게 드는것도 까미노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짐을 풀고 약을 먹고 침대에 뻗어있으니 온갖 상념에 또다시 빠져든다. 오늘은 처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친 후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이제 무얼 먹고 살아야 할지,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을지. 대안이 없는 고민은 걱정만 만들어낼 뿐이라 되도록이면 먹고사니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중인데도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고민에 빠져든다.

많은 사람들이 걷는 중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어본다. 나는 주로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편이다.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친구들, 여전히 미안한 감정이 많은 직장 동료들, 돌아가 조언을 얻고 싶은 인생의 선생님들, 그리고 가족들까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일줄 알았는데 내 주위를 돌아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음을 또 한번 느끼기도 하고.

자축하며 맛있는 햄버그스테이크를 냠.

홀로, 외딴 도시에서 보내는 생일도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자축했다. 스페인에서 만 28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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