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왔다, 생각이 들 때부터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각 국의 사람들이 모여 자는 알베르게에서는 밤마다 코골이의 향연이 펼쳐진다. 세상에 또라이 질량법칙이 존재한다면, 이 곳 까미노에서는 코골이 질량법칙이 존재한다. 미친 존재감의 코골이 한 명은 주위 모든 사람들의 잠을 설치게 하는데, 만약 운 좋게 이런 사람이 없는 밤에는 자잘자잘한 코골이들이 마치 합주라도 하듯 울려퍼진다. 결국 총량은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마저도 없는날에는 내가.....?!
내가 코를 골았는지는 모르겠고, 무튼 오늘도 날이 밝았다. 이탈리아 아저씨의 힘찬 코골이 소리를 알람삼아 일어나 새벽부터 나갈준비를 하니 여섯시 반이다. 여느때보다 일찍 준비를 마쳐 기분이 좋다. 완전 야행성이던 내가 아침 다섯시 반부터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고 있게될 줄이야.
오늘은 유난히도 일출이 아름답다. 이 나라는 해 뜨는 시각이 오전 7시 반 정도이기에 순례길을 걷다보면 해 뜨는 장면을 하루에 한번 꼭 보게된다. 구름도 적당히 끼어있을 때 떠오르는 일출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넋을 잃고 바라보다 사진을 찍어 한국의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기분좋게 발걸음을 걷다 우연히 한 명이 앞을 지나가는데 배낭에 "DOKDO"라고 쓰여진 뱃지가 달려있었다. "한국 분이세요?" 라고 말을걸자마자 반갑게 들려오는 한국어. 나처럼 혼자 이 길을 찾은 보라언니였다. 우연한 기회로 또 동행이 생겼다.
길을 걷다가 양 갈래의 길이 나왔다. 조금 돌아가는 길과 지름길이 있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선택한 조금 돌아가는 길에 그 유명한 이라체 수도원이 있었다! 이라체 수도원은 콸콸 쏟아져나오는 와인 샘으로 유명하다. 어디 있는지 자세한 정보를 몰랐는데 이렇게 우연한 기회로 접하다니. 아침 시간이라 콸콸 까지는 아니고 졸졸 나왔는데, 생각 외로 먹을만 했다. 은혜로운 산티아고 순례길.
아주 약간의 취기와 함께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쉬고있는 사람들 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첫날 오리손 산장에서 인사했던 일본인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다행히 할아버지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걸음이 느린 덕에 할아버지와 뜻밖의 동행을 하게 되었다.
이름은 아다치 상, 올해 나이 73세. 영어가 짧지만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할 줄 아는 일본어를 총동원했더니 흐뭇하게 웃어주셨다. 아다치 상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3번째라고 하셨다. 나이를 잊은 체력에 감탄, 그의 취미 생활이라는 그림 그리는 모습에 또 감탄. 일본 가요 장르 중 하나인 엔카를 안다고 했더니 즉석에서 구수하게 한 곡조 뽑아줬다. 까미노 순례길에선 말은 잘 안통해도 교감이 가능하다.
그렇게 같이 걷다가 내가 조금 더 속도가 빨라 또다시 혼자 걷게 되었다. 같이걷다 혼자걷다 하는게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진다. 이제는 평지라서 저 멀리 내가 가야하는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라는 마음이 들자마자 이미 내 몸은 쉴 준비 태세를 갖췄다. 더 가야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음이 풀려버리니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 때부터 새로운 고비가 찾아왔다. 역시 몸을 통제하는건 마음의 문제였을까.
하루 일정 중 가장 힘든 고비가 바로 목적지가 손에 잡힐 듯 보이기 시작하는 그때부터다.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다는 마음은 긴장되었던 몸을 방심하게 만들고, 잘 잡고있던 정신줄을 놓게 한다. 로스 아르코스까지 남은 거리 3km, 거의 네 발로 기어서 겨우겨우 마을에 도착했다.
이제 마을의 여러 알베르게 중 내가 묵을 장소를 선택할 차례. 이미 지칠대로 지친 나는 걷던 중 보이는 아무 알베르게나 골라서 들어갔다. 엄청나게 좋은 시설은 아니었음에도 사설 알베르게라 가격은 9유로였지만, 뭔가를 더 따질 여력이 없던 나는 그냥 무조건 묵겠다고 하고 짐을 풀었다.
한참을 그렇게 뻗어있다가 정신차리고 샤워한 후 마을 투어에 나섰다. 동네를 돌아다니다 길에서 만났던 보라언니와 다시 조우했다. 어디서 묵냐고 물어봤더니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에서 묵는다고. 사진을 보여줬는데 내가 묵는곳보다도 깔끔하고 좋아보였다. 그런데 가격마저 6유로! 정신줄을 잡고 있었다면 보다 이성적인 선택이 가능했을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인생의 모든 결정에서도 다 됐다 싶을때부터 진정한 레이스가 시작된다. 끝까지 뒷심을 유지해야 후회없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조그만 진리를 순례길에서 배운다. 걷는 길에는 이렇게 우리네 인생이 녹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