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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걷는길 (8) 로르카에서 에스테야까지

걷기 싫어질땐 어떻게 해야하지?

by 신아영

로르카 Lorca - 에스테야 Estella 8km



아침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같은방에서 잠든 세라는 잠에서 깨기 싫어서 잠투정을 부렸다. 역시 부지런하신 독일 할머니와 비슷하게 출발했다. 여섯시 반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게 익숙해질 줄이야.

부지런한 독일 할머니, 그리고 그림자의 나

오늘은 걷기 시작한지 8일째 되는 날이다. 딱 일주일 정도 지난 지금 이제는 체력의 문제보다 마음의 문제가 생기고 있다. 걷고싶어도 걸을 수 없었던 초반에 비해 체력은 남지만 계속 걸어야하나 하는 의구심이 마음 속 한 켠에서 스물스물 올라온다.

같은 일을 꾸준히 해내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 특히 여행과 순례의 중간 성격으로 애매하게 걷고있는 나는 걸어야할 이유에 대해 꾸준히 답해주지않으면 언제든 걷는것을 멈추고 바르셀로나로 날아가 휴양을 즐기면 되는 상황이라 더 그렇다.

왜 걷고있는지 스스로 물어봤을때 아직 뾰족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유행가 가사처럼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하는 상투적인 질문을 던져도 답을 모르고 그저 걷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이름모를 동네의 약수터(?)를 만나 물을 채우고 벤치에 퍼질러 누워있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어젯밤 만난 가브리엘과 몰리였다.

"왜 여기있어? 우리랑 같이가서 아침 먹자"

가브리엘 모녀와 함께 먹은 아침. 부실해보여도 은근 든든하다.

게으름 피던 나는 그렇게 부지런한 모녀에게 이끌려 어느 Bar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메뉴는 고작 초콜렛 조금 박힌 빵과 오렌지주스가 전부였지만 사람들과 함께여서인지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그 곳에서 만난 이탈리아 출신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다.

이제와서 고백하지만 제대로 누군가와 함께 걸어본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초반에 만났던 한국 분들은 페이스가 너무 빨라 느린 나로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느린 나를 기다려주는것도 미안했기 때문에 먼저 가라고 계속 말해야 했다. 그리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빨랐기 때문에 다 나를 스쳐 지나갔을 뿐.

그러나 이 날은 처음으로 함께 걷는 일행이 생긴 느낌이었다. 서로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약 5km 정도를 함께 걸으며 작은 교회에 들어가 소원을 적기도 했다. 왜 이 친구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는지 아직도 후회된다. 함께 걷다가 내가 겉옷을 정리하느라 멀어졌는데 그 과정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일행이 있다가도 언제곤 다시 만날것처럼 자신의 페이스대로 걷는 곳이 까미노다.

몰래 찍어둔 나의 동행자 그녀.


그렇게 약 8km 정도를 걸었더니 나름 대도시인 에스테야 Estella 가 나타났다.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여 한국말로 말을 걸었더니 역시 한국 사람이었다. 첫날 한국사람들과 헤어진 후 오랜만에 만난 한국사람.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역시 말은 모국어로 해야 제맛.

잠시 마을을 둘러보다가 대성당에 들어갔다. 신부님이 알 수 없는 스페인어로 열심히 설명해주시더니 순례자의 기도문 영어 버전을 하나 내어주신다.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코피가 났다. 엄청 당황했는데 신부님이 침착하게 화장실로 안내해주셔서 잘 처치했다. 갑자기 코피가 날게 뭐람. 그나저나 이번 순례길에서는 성당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경건한 분위기의 에스테야 대성당

다시 성당을 나서 마을 광장에 가보니 오늘 걸음을 함께 걸었던 친구가 눈에 띈다. 그녀는 이 마을에 오늘 축제가 있는데 자신은 번잡한 것이 싫어서 빨리 이 마을을 떠날거라고 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시끌벅적한 것보단 조용한 마을을 선호하는듯 했다. 나는 걷기 싫었던 마음과 축제를 구경하고 싶은 관광객 모드가 결합되어 무작정 에스테야에 머물기로 했다.

에스테야 마을 축제

에스테야의 주민들은 모두 하얀 옷에 빨간 스카프를 둘렀다. 나같은 외지인들만 평상복이고 마을 주민들은 모두 옷을 맞춰 입었다. 마을 축제라고 하면 관공서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위한 행사만 떠올랐었는데 스페인의 마을축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가 어우러지는 한마당이었다. 울타리를 치고 길 한 가운데에서는 할아버지와 소년들이 한 팀이 되어 흥겹게 축제 음악을 연주하고 마을 광장에서는 커다란 인형들이 행진을 한다.

맥주 한 잔 곁들이며 마을 축제를 구경하고 있노라니 내가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을 지경이다. 푹 쉬었으니 다시 내일은 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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