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서 길을 선택했다면, 일단 믿고 걸어본다
이 날은 처음으로 알베르게에서 아침을 먹지않고 출발했다. 피곤에 절은 사람들의 코골이 합주에 다들 피곤할텐데도 새벽 여섯시 경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어나 부지런히 갈길을 준비한다.
어제 걸으면서 걷는 즐거움과 더불어 알수없는 자신감까지 생긴 터라 마음은 가벼웠다. 그러나 오늘의 까미노는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알다가도 모르겠는게 까미노다.
보통 순례자들은 파란 바탕에 노란 조개껍데기 표식을 따라 길을 찾는다. 지금까진 문제없이 길을 찾아왔는데 오늘은 유난히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상황들이 많았다. 길은 여러 갈래인데 갑자기 잘 보이던 조개 껍데기가 보이지 않는다든지, 애매한 방향으로 붙어 있다든지.
고민과 망설임 끝에 길을 선택하고도 이 길이 맞나 의구심이 자꾸 들어 오도가도 못하고 몇분을 허비했다. 결국엔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길을 열심히 걸었는데 한 십분 정도 걸으니 그때서야 보이는 선명한 파란 조개껍데기.
고작 저 표식이 잠깐 안보였다고 이 길이 맞는 길인지를 한참 불안해하다가 다시 내가 잘 가고 있다는 이정표가 나오자마자 사라지는 불안감이란. 결국 내가 길을 선택했으면 일단은 믿고 걸어보는게 최선의 방법임을 깨닫는다.
오늘은 약 20km를 걸어 로르카 라는 마을에 묵기로 결정했다. 에스테야 Estella 까지 가면 큰 도시이기에 숙소나 식사 등의 선택지가 다양해지지만 20km 이상을 걷는것은 굉장히 힘들 뿐더러 큰 도시의 번잡함보다도 작은 도시의 고요함이 마음에 들던 참이라 로르카까지만 걷기로 했다. 20km라고 만만히 볼게 아닌게 막판 2km는 내가 어떻게 걷는지도 모르게 초인적인 힘을내어 꾸역꾸역 일정을 마무리했다.
작은 마을에 묵게되면 상대적으로 알베르게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아진다. 이번에 선택한 알베르게의 주인분은 이름이 호세였다. 가는길에 한국어로 된 안내문도 자세히 붙어있고 유난히 한국말을 잘하길래 왤까 궁금했었는데 알고보나 부인분이 한국분이시라고..! 이번 로르카에서는 주인 분을 비롯해서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펨, 스페인 출신의 강렬한 사라. 둘은 친구였고 친구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온순한 펨과 강렬한 사라. 사라의 수많은 문신과 피어싱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들이 17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 세게 생겼다고 무조건 '언니'는 아니지만, 나는 사라에게 언니라고 부르고만 싶었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온 몰리와 가브리엘. 몰리가 친절하게 내게 말을 걸어줘 대화가 시작됐다. 그녀는 캐나다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내 왼쪽에 앉은 가브리엘이 그녀의 딸이었다. 순례길에는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 같은 부분 가족조합이 많이 보인다. 나중에 엄마와 함께 외국에 여행을 와도 많은 추억이 생기겠구나 싶었던 부분들.
가브리엘은 19살이었는데 엄마가 와인을 권해서 캐나다에선 미성년자가 술먹는게 불법이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일부 주에서는 19세부터 음주가 가능하단다. 때문에 주를 벗어나 합법적인(!) 음주를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미성년자들도 있다고. 어느 나라나 미성년자들이 술먹고 싶어하는건 매한가지인가보다.
가브리엘과는 처음으로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다. 종종 메신저로 이야기하자는 밝은 그녀를 보니 나까지 힘이 난다. 내일을 위해 어서 잠자리에 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