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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걷는길 (6) 팜플로냐에서 우테르가까지

내리막길에선 속도에 몸을 맡기는 것도 방법이다.

by 신아영

팜플로냐 pamplona - 우테르가 uterga 18km



아침을 간단히 챙겨먹고 길을 나섰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납작한 복숭아가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제 마트에서 몇 개 사서 아침에 먹었는데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이가격에 이 맛이면 매일매일 사먹을 수 있다. 역시 스페인은 물가가 싸다. 복숭아 세 알과 하리보 젤리, 맥주 두캔, 오렌지주스, 초콜릿과자 까지 샀는데도 4유로 정도 나왔다. 심지어 삼겹살 600그램이 3유로도 안하는 나라다. 오 마이 갓.

이게 4유로!

팜플로냐 도심을 빠져나가며 알 수 없는 콧노래까지 나왔다. 오늘 컨디션 좋구나. 기분좋은 발걸음으로 하루를 연다. 아침의 첫 발걸음을 체크해보면 그날의 컨디션이 얼추 감이온다. 오늘은 잘 걸을 수 있겠다.

해뜨기 전의 팜플로냐. 안녕!

대도시 팜플로냐를 지나면 이제 급격한 경사보다는 넓직한 들판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보통 우리나라는 가을에 곡식들을 수확하는데 스페인의 들판은 이미 농부들이 열매를 수확한 흔적만 남아 있었다. 꽉꽉 여문 곡식들은 간데없고 허리잘린 황갈색 흔적만이 가득한 들판.

오늘의 여정은 푸엔테 라 레이나 마을까지 가는 것. 마음만 이렇게 먹었지 실제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갈 수 있을 만큼까지만 힘을내서 걸어가보자 마음먹으니 발걸음이 가벼울 수 밖에.

팜플로냐에서 유심카드를 구입한 덕에 한국과의 연락이 수월해졌다. 덕분에 친구들과의 연락도 활발히 했고, 페이스북, 브런치 등의 SNS에 내 소식을 올리는 일도 원하는 때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나는 종종, 자주 한국을 생각한다. 순례길 위에서의 생각은 보통 뭔가를 생각해야지 하고 시작되는게 아니라, 문득문득 뜬금없이 하나의 생각타래가 떠오르면 그에대해 내 나름대로의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형태로 진행된다.

생각에 있어서 나는 철저히 피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내가 생각을 주관하는게 아니라 걷다보면 떠오르는 주제들에 대해 생각해내는 중이다. 인간관계, 한국의 사회, 여성주의 같은 큰 주제부터 내가 그만둔 전 직장, 결혼, 부모님, 퇴사 후 미래와 같은 개인적인 키워드들까지 생각의 가지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소리소문없이 찾아왔다가 답도 얻지못하고 다시 사그라드는 많은 생각들.


그렇게 걷다가 또 내리막길을 만났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리막길은 항상 버겁다. 오르막길은 열심히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리 없지만, 내리막길은 언제 어떻게 굴러버릴지 몰라 긴장이 된다. 다 내려오고 나면 긴장한 나머지 몸 구석구석이 아파오는 것이다.

산 중턱에서 만난 조형물. 이젠 내리막길을 걸어야 한다.



오늘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비탈길의 가속도에 맞춰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굴러버릴까 걱정되던 마음도 잠시, 의외로 수월하게 내리막길을 내려갈 수 있었다.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 내리막길에서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자연의 섭리를 몸으로 받아들이는게 내리막을 수월하게 내려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걷다보니 우테르가 uterga 라는 마을이 나왔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는데 햇살이 너무 좋아 빨래를 이 햇살에 말리고싶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여기에서 하루 묵기로 결정했다.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 짐을 풀고 등산화를 벗으니 이곳이 천국이다.

오늘의 걸음을 돌아보면 처음으로 걷는 즐거움을 깨쳐갔던 날이었다. 고생 - 괴로움 - 기진맥진 - (어쩔수없이) 휴식 의 루트를 벗어나 즐거움의 감정을 느꼈달까. 이 길 위에는 희노애락의 감정이 모두 녹아있다.


걸으면서 만났던 뜻밖의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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