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산티아고 걷는길 (19) 비야당고스~오스피탈데오르비고

길에서 만나는 조건없는 호의들

by 신아영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Villadangos del Paramo -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Hospital de orbigo 18km



해뜨기 전 매번 접하는 풍경

요즘은 여섯시 반 정도이 길을 나서는데 삼십분 정도 일찍 나왔을 뿐인데도 세상은 온통 암흑 투성이다. 길은 캄캄하고 걷는 사람은 나 혼자여서 짐짓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패기있게 길을 나선지 한 시간만에 길을 잃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열심히 가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나는 길을 잃어버린 것일까. 당혹감이 밀려오는데 물어볼 사람 한 명이 없었다. 정말 오늘은 완벽하게 길을 잃어버렸다.

옥수수는 키가 정말 커서 시야확보가 어렵다

그것도 하필이면 나보다 키가 훌쩍 큰 옥수수밭에서 길을 잃었다. 시야가 가려져 어느 쪽으로 가야 마을이 잇고 큰 길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옥수수밭 사이의 나는 너무나도 작고 연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급한대로 구글 맵을 켜서 다음 마을로 가는 방향만 얼추 잡고 하염없이 길을 걸었다. 마을을 찾고 사람을 만나면 뭐라도 해결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헤매고 있는데 저 멀리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걸어오는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No Camino!" 하고 엄청 크게 외쳤다. 그리고는 스페인어로 뭐라뭐라 설명해 주시는데 손짓 발짓을 집중해서 보니 여기서 앞으로 더 가다 왼쪽으로 꺾으라는 말 같았다. 할머니 말 듣고 길잃든 여기서 헤매든 비슷할것 같아서 무작정 할머니의 손짓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 가고 있는데 할머니가 다시 쫓아오시더니 여기서 꺾지 말고 조금 더 앞으로 가서 꺾으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내가 잘 가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 다시 길을 돌아오신 것이다. 생전 모르던 사람에게 받은 최대의 호의였다.

다시만난 노란화살표 반갑다 ㅜㅜ


정말 다행히도 길을 헤맨지 두시간 반 만에 반가운 화살표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길을 찾았다는 안도감과 반가움이 몰려왔다. 옥수수밭의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몇 시간이고 더 헤맸을텐데 다행이었다. 이렇게 뜻밖의 사람들에게 조건없는 호의를 받는 길이 순례길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가려고 벤치에 앉아 오레오 과자와 오렌지 주스를 먹는데 왜 그렇게 처량하게 느껴지던지. 스페인 길바닥에서 우적우적 씹었던 오레오의 맛을 오래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이래저래 이 길 위에서는 평소에 느끼지 못해왔던 감정들을 느끼게 된다.

아침에 길을 잃었던 충격이 커서였는지 더 걸으려고 했던 걸음을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에서 멈추고 점심을 해결했다. 오늘따라 인스턴트 피자가 먹고싶어 피자를 시켰는데 레귤러 피자 한 판이 그대로 나온다. 콜라랑 함께 먹으니 이제서야 좀 긴장이 풀린다.

아기자기했던 San Miguel 알베르게

우리에게 익숙한 San miguel 이름을 가진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아기자기한 숙소가 맘에 들었다. 숙소에서 엽서를 보낼 수 있게 되어있어서 집으로 엽서를 보냈다. 엄마 아빠는 아직 내가 순례길에 온 줄을 모르고 있다. 걱정하실까봐 그냥 스페인으로 놀러간다고 말했었는데 이번 엽서에서 고해성사를 했다. 부모님께 엽서를 보내본적이 있었던가, 여기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많이 쌓는다.

물집전용 밴드 콤피드

커진 물집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약국으로 가 물집전용 연고와 콤피드라는 물집전용 패드를 구입했다. 인터넷에서 본 대로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 끝과 끝을 관통했다. 물집을 통과한 실은 그대로 두면 서서히 물집 안의 수분을 흡수한다고 한다. 내가 내 발을 바늘로 꿰매듯 바느질 하는 모습이 약간은 우스꽝스러웠다. 실이 꿰어진 물집에 물집전용 스프레이를 뿌리고 내일 아침에는 콤피드를 붙여야지. 나는 낙타가 아니야, 물집아 사라져라.

이제 온전히 걸을 날이 열흘도 채 남지않았다. 이 페이스대로면 산티아고까지는 한번 더 교통편을 이용해 이동해야 할듯 싶다. 잘 걷는 사람 기준으로 일정을 잡은것도 모자라 초반 이틀은 프랑스 관광을 했고 스페인에서도 매력적인 동네에서는 무작정 하루를 묵었으니 일정이 모자라는게 당연하다.


잘 걷지 못하는 내 모습까지도 나라는걸 인정하는 순례길 여정이다. 걸을 수 있을때까진 어디까지든 열심히 걸어보자


알베르게에서 만난 살아가면서 기억해둘 것.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산티아고 걷는길 (18) 레온~비야당고스델파라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