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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걷는길 (18) 레온~비야당고스델파라모

과욕은 내 짐을 무겁게할 뿐

by 신아영

레온 Leon -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Villadangos del Paramo 22km



뜬금없이 모르는 사람이 나오더니 기찻길을 살펴보다 기차에 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꿈을 꿨다. 모르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흔하지 않은데 그 사람의 죽음까지 바라봐야 하는 꿈이었다. 왜 이런꿈을 꾸었을까.

약간은 찝찝한 마음으로 길을 나설 채비를 했다. 어제 함께 방을썼던 이탈리아 아저씨 두명은 밝은 인사를 남기고 사라지셨다. 처음으로 썼던 3인실은 쾌적했으나 그만큼 작은 공간에서 울리는 코골이 소리는 웅장했다.

새벽의 레온. 운치있다

새벽에 레온 도심을 빠져나가는 길은 환상처럼 느껴졌다. 아직 어둠이 밀려나지 않은 도심 곳곳은 마치 미드나잇 인 파리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마치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까미노에서 길을 잃기 쉬운 순간들이 있는데 내가 가장 길 찾기 어려워하는 구간 중 하나가 바로 아침에 도시를 빠져나갈때다. 알베르게도 여러 군데에 있고 길도 정말 많아서 단조로운 길 하나에 화살표만 의지해 걷는 순간들과는 다르게 길을 찾아내야 한다. 보통 이럴때는 내 앞에 걸어가는 다른 순례자들 무리를 보며 대충 감을 잡는 편이다. 오늘도 다행히 내 앞에 사이좋은 커플이 걸어가고 있길래 이 길이 맞나보다 안심하고 따라갔다.

그리고 내가 따라가던 커플은 유유히 어제 내가 내렸던 레온 기차역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이없게 어제 처음 발을 디뎠던 레온 기차길에서 길을 잃었다.

당혹스러웠다. 화살표는 이미 시야에서 멀어진지 오래였다. 정신을 차리고 구글 맵을 켜보니 북쪽으로 갔어야 하는걸 남쪽으로 내려온 모양이었다. 다시 돌아가서 화살표를 따라갈까, 새로운 길을 뚫어볼까. 고민하다 다음 마을까지의 방향을 잡고 무작정 새로운 길을 뚫어보기로 했다.

원래 걸었어야 할 레온 도심 길이 아닌 변두리 길을 뚫다보니 외곽의 풍경을 많이 봤다. 화려한 도심과는 다르게 약간의 빈부격차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화살표를 잘 따라갔다면 보지 못했을 레온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렇게 1km정도를 걸었을까, 다행히 다시 반가운 노란 화살표가 보였다. 돌아가더라도 방향만 잘 잡는다면 길은 새로 개척할 수 있는거구나.

언제 어디서 만나도 반가운 이정표

까미노에서 짊어지고 가는 배낭의 무게는 인생의 죄의 무게와 같다고 누가 그랬던가. 오늘 배낭은 역대급으로 무거워 나를 괴롭게 만들고 있다. 왜 갑자기 배낭 무게가 무거워졌나 하면, 바로 나의 욕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레온은 대도시라 마트도 많았고 마트에서 파는 먹을거리들이 쌌다. 내일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과일과 음료수, 기타 먹을거리들을 구입해 배낭에 넣고 걷는데, 그것 조금 넣었다고 배낭이 두 세배는 무거워진것만 같았다. 어깨와 허리에 가해지는 압박이 장난아니었다.

내가 만들어낸 무게를 먹어치우는 중..

결국 중간 지점에서 과일은 먹어치우고 음료수는 몇 입 못먹고 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과욕이 부른 참사였다. 배낭의 무게가 내 죄의 무게라면, 필요하지 않은 욕심 역시 내 죄에 속하나보다.

오늘은 해가 정말 세다. 간만에 스페인 태양의 뜨거운 맛을 보는 중이다. 팔 다리는 아무리 선크림을 발라도 입은 옷 모양을 남기며 새까맣게 타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것 태닝한다 셈 치고 반팔 소매를 어깨끝까지 치켜올려 팔 전체를 태우며 걸었다.

멋진 벽을 찍으려는데 강한 햇살이 찬조출연

피레네를 넘을 때도 느꼈지만, 해가 쨍 하고 뜨면 날은 더워도 멋진 풍경이 펼쳐지고 사진도 예술적으로 찍힌다. 반면 구름이 낀 날은 멋진 사진은 찍기 어렵지만 선선해 걷기가 수월하다. 뭐든 다 가지려고 하는 순간 오늘의 나처럼 내가 채운 배낭을 비워내는 사태가 일어난다. 인생에 있어 진짜 필요한게 뭔지 나도 모르게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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