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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가는길 (8) 팔라스 데 라이~아르수아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지라도

by 신아영

팔라스 데 라이 Palas de Rai - 아르수아 Arzua

밤부터 왼쪽 발목에 통증이 시작됐다. 그동안의 통증들은 자고나면 그래도 가라앉았는데 이번 통증은 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발목이 데인것처럼 열이 올라온다.

칠흑같이 어두운 아침, 나의 발목도..

그냥 엄살이겠거니 하고 아침에 준비를 시작하는데 영 심상치않다. 꾸역꾸역 짐을 싸고 일어나 걷는데 정말 앞으로 못 가겠더라. 이제는 걷는것에 좀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완벽한 나의 오만이었다.

거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싶었다. 왜 계획한대로 이뤄지는건 아무것도 없는건지. 정말로 이 길은 만만히 봐서는 될게 아니었다는걸 체감하니 힘이 더 빠졌다. 하루 더 이 마을에서 쉬어야 하나 싶었는데 눈앞에 띈 버스 정류장. 우선은 버스를 타고 다음 마을로 가야겠다 싶어 버스를 기다렸다.

이제는 산티아고까지 바로 가는 버스도 있다


이제 가까워진 산티아고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도 있었다. 이제와서 더 걷는게 무슨 소용일까. 잘 걷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면서, 또 응원해주는 지인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버스에 올라타 아르수아라고 행선지를 답했다.

역시 버스를 타니 아르수아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내려서 아직 문도 열지않은 알베르게 오픈을 기다리며 열심히 발목을 주물렀다. 발목이 살살 가려운게 신경쓰였는데 별일 아니겠지 하고 넘겼는데.. 이게 또 나중에 부메랑처럼 돌아올 줄은 이땐 몰랐다.

아르수아 공립 알베르게에 등록 후 자리를 배정받고 일회용 시트를 까는데, 어디서 검은 벌레가 스물스물 기어나오는거다. 자세히 보니 그 악명높은 베드버그였다. 순식간에 쳐냈는데 생각해보니 그 놈을 잡아 죽였어야 하는데 싶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간 베드버그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을 오며가며 많이 만나와서 그런지 베드버그에 대한 공포감이 극에 달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가뜩이나 몸과 마음이 힘들었는데 베드버그가 나온 침대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리셉션으로 돌아가 베드버그가 나왔다는 상황을 설명하는데 이 아주머니가 너무나도 평온하게 응대하는거다. 환불을 해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그러면 침대라도 바꿔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다시 자리를 잡은 사립 알베르게. 여기는 다행히 깔끔했다 .

결국 울며겨자먹기로 공립 알베르게에 낸 6유로를 포기하고 맞은편 사립 알베르게에 다시 들어갔다. 짐을 풀고 침낭을 깔아 위에 눕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발목이 살살 간지러워 몇번 더 긁다가 꺼림칙해서 자세히 살펴봤는데, 갑자기 발목에 좁쌀만한 것들이 마구 올라오고 있었다.

증상이 딱 베드버그에 물린 것과 동일했다. 그 난리를 펴고 베드버그를 피하려고 도망다녔는데 어차피 한 번은 물릴 운명이었던가. 재빨리 팔 다리 다른곳들을 살펴봤는데 다행히 다른 곳은 아직 번지지 않았다. 아까 그 알베르게에서 물린걸까, 베드버그는 잠복기가 2-3일이라던데.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물린거지. 왜 하필 오늘 악재가 연속으로 터지는 걸까.

오늘은 정말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생각하니 허탈한 웃음만 났다. 이 모든 상황을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것도 와닿지가 않았다. 항상 어려움이 닥쳤을때 어느 곳이든 의지할 데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완벽하게 혼자다. 잘 걷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발목이 말을 듣지않고, 베드버그를 그렇게 피하려고 돈을 낭비했는데 결국 어디선가는 베드버그를 물리게 되어있었고.

이 길 위에서 이토록 나약한 나의 모습을 다시한번 실감한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아직 크게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 베드버그도 더 번지지 않음에 감사하며 내일을 준비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철저히 깨지고 깨지는 까미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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