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움이 열어준 또 다른 차원의 세계
회사를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 나는 본격적으로 백수 생활을 '누리고'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누린다'는 표현이다. 내가 그동안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거나, 혹은 둘 다 없어서 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아무 제약받지않고 하고있다는 거다.
나는 요즘
일주일에 두번,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수영을 배우러 다닌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빵 몇개를 사와서는 선물받은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 샷을 추출해 빵과 함께 먹는다.
가끔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만나 여유로운 점심을 먹기도 한다. 보통 평일 점심을 먹는다는건 상대방도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기 때문에 일부러 맛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사치도 가능하다.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어도 좋고, 집밥이 그리워 갑자기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는것도 가능하다. 헬스장에 가서 PT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뻐근한 몸을 풀어주는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다보니 퇴사 전부터 이미 즐길 수 있었던, 혹은 이미 즐기고 있었던 행동들이다. 백수의 삶을 빛내보고자 내가 요즘의 행동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인지, 아니면 최근 내 몸과 마음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건지.
고백하자면 나는 촌스러운 사람이다.
유년기 시절 부모님은 매일 맞벌이에 바쁘셨고 집안 형편도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다. 내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세계는 딱 단칸방 우리집만큼이나 비좁았다.
그런 우리 가족이 여가를 보내는 법은 단순했다. 그저 TV를 통해 대중문화를 소비하거나, 때론 책을 읽으며 멋진 사람들의 경험을 간접 체험하는게 전부였다.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친구들의 집 풍경은 나와 조금 달랐다. 그들은 밥 먹고 사는 일을 여유롭게 해결한 후 보다 고차원적인 욕구를 해결하려 했다.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것이나, 좀 더 건강에 좋은 음식을 찾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색하지 않다. 어린시절의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다.
그리고 이제, 돈과 시간이 많아진 지금 나는 어설프게나마 세련된 이들이 누려왔던 것들을 맛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생계의 수단을 손에서부터 놓은 후부터 더 본격적으로.
결국 요즘 내 삶의 만족도는 여유로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물질적, 시간적 여유로움은 일상의 본질에 접근하는데 도움을 준다. 업무에 쫓기며 허겁지겁 밀어넣는 샌드위치 한 입과, 집에서 직접 내린 커피를 곁들여 갓 구운 빵 한 입. 두 장면에서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차원이 다른 세계를 알아가는건 배움의 기쁨이다. 물과 친숙하지 못했던 내가 수영의 즐거움을 서서히 깨닫고, 물의 양을 조절하며 에스프레소 샷을 추출할 땐 무궁무진한 커피의 세계에 감탄하기도 한다.
그간 겪어보지 못한 이 풍요로움들 속에서 나는 눈앞이 아득해진다. 곧 수중의 돈이 떨어진다면,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상들일지라도, 지금 당장은 이 여유를 만끽해보기로 한다. 여유를 제대로 즐겨본 자라면 바쁜 일상 속에 다시 던져질지라도 이내 여유로움이 선사했던 행복감을 기억해낼 것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