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조용한 곳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모두의 축제다.
연말연시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도시를 감싸고, 알 수 없는 기운에 휩싸인 사람들의 표정은 사뭇 상기되어 있다. 길을 꽉꽉 채우는 흥겨운, 익숙한 시즌송들 틈에서 뭐라도 특별한 일을 해야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피해서만 하고싶어하는 반역분자의 기질이 다분한 우리는 뜻밖의 '템플스페이'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것도 어쩌면 특별한 크리스마스 계획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작정 네이버에 "템플스테이"라고 검색했더니 다행히 관련 사이트가 있었다. (http://www.templestay.com/) 몇몇 곳을 둘러보다가 우리는 설악산 중턱에 자리한 강원도 인제 '백담사'로 행선지를 정했다. "차와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템플스테이"라니. 프로그램 이름도 마음에 쏙 들었다.
떠나는날 며칠 전, 예약 확인을 위해 전화를 걸었는데 약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라 "겨울에는 마을버스가 안다녀서 한시간 반 정도 걸어올라오셔야 해요"라고 하시는 거다. 다행히(?) 산티아고를 다녀온 후에는 몇km 라고 하면 대략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얼마나 힘들지 감이 오기 때문에 흔쾌히 괜찮다고 답했다. 이것도 산티아고가 준 축복이라면 축복이겠군.
대망의 크리스마스 이브. 동서울에서 백담사 가는 버스표를 끊고 잠시 버스에서 눈을 붙이니 2시간여만에 백담사입구 버스터미널까지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일줄 알았는데 이곳도 사람사는 마을인지라 식당도 곳곳에 있고 제법 관광지 티가 났다.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려는데 친구 집에 놀러온것만 같은 정겨움이 느껴진다.
올해는 예년만큼 춥지도 않았고, 눈도 많이 오지 않았는데 강원도에 와보니 진짜 겨울을 만난 기분이었다. 눈이 제법 쌓여있었고 올라가는 길에 가늘게 눈발이 날렸다. 기대치도 않았던 뜻밖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눈이 얼어 길이 미끌미끌했고, 미끄러질까 조심해서 한 걸음씩 걸었다.
눈 덮인 설악산은 지루한 표현이지만 한 폭의 그림같았다. 길이 미끄러 걷는 것에만 집중하다가도 풍경에 넋을 잃고 감탄을 내뱉으며 온전하게 즐기는 산행이었다. 쉬엄쉬엄 약 두시간 정도를 걸어 백담사에 도착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러서 한번,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은신해서 또 한번 유명해진 절이다. 설악산 꼭대기로부터 백 번째 호수(潭)가 있는 곳에 터를 잡아 백담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간단히 지켜야할 사항을 듣고, 수련복을 받았다. 입고있던 옷에 조끼만 걸쳤을 뿐인데 벌써 경건한 기운이 올라온다.
그리고, 핸드폰을 제출해야 했다. 이왕 이렇게 올라온 것, 잠시동안이라도 전자기기와 멀리하는 생활을 해보라는 설명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끄덕. 이제는 이렇게 강제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면 스마트폰을 멀리하기도 어려운 삶이다. 조용히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이름을 적어 제출하면서 백담사 크리스마스 템플스테이는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