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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기 Feb 03. 2022

'컨디션'과 '슬라임'을 같이 사는 나는

기록하는 2022년│Episode 4│2022.02.03

2월의 첫 출근도 무사히 마쳤다. 꿈같던 5일간의 연휴 끝에 맞이한 회사에서의 하루는 늘 그렇듯 힘들었다. 그럼에도 내일이 벌써 금요일이라는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사실 정말 정말 정말 진짜로 다행이다.


근로일 기준으로 매월 첫날은 꽤나 바쁜 날이다. 1일 자에 맞춰해야 할 정해진 일들이 있고, 지난달에서 새로운 달로 넘어가면서 월 별 마감과 출발 자료를 취합해야 한다. 현 직장에서 이 일을 한지 약 5년 8개월 정도 지나고 있는데, 처음에는 지금보다 많이 힘들었다. 나는 꽤나 게으르고 포기가 빠른 사람인데, 남들과 함께 하는 일들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지나치게 책임감을 갖는 편이다. 좋게 말하면 책임감일 것이고, 사실은 그냥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것을 전혀 못 견디겠다. 그래서 정해진 날짜에 맞춰 정해진 일들을 해나가는 것이 유독 힘들었다. 회사 업무란 게 사실은 1일에 하면 가장 좋다는 것이지, 하늘이 두쪽 나도 무조건 1일에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은 아님에도 나는 그 정해진 날에 정해져 있는 모든 일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유난 떨며 혼자 스트레스받으며 정해진 날들의 일들을 해왔다. 몇몇 날들에 휴가를 못쓰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바쁜 날에는 점심 약속도 잡지 않고, 내일의 출근을 위해 전날 컨디션 관리를 하며 떨면서 잠들었다. 친구들 역시 이제 그런 날들에 연락했다가, "아 그날이구나. 다음 주쯤 보자."하고 전화를 끊는 지경에 이르렀다. 


웃긴 것은 내 일이 그럴 정도로 심각한 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스스로 정한 몇 가지 규칙에 얽매여서 스트레스받고, 숨 막히게 지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나와 회사를 위한 태도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그동안 쌓아왔던 불안과 스트레스 덕에 한차례 사고를 크게 치고 난 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내가 그렇게 혼자만의 강박에 사로잡혀 힘들었다는 것을 당연히 아무도 모른다는 것과 그런 태도가 나와 회사 모두에게 장기적으로는 마이너스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조금 놓게 되었다. 실수 없이 일을 해나가는 것도 좋지만, 조금은 더 즐겁고 쉽게 회사 생활을 해나가자고 생각했다. 조만간 내가 친 사고에 대해서도 적어봐야겠다. 적어놓고 보면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창피할 것 같다.


어쨌든 오늘은 조금 놓기로 결심한 뒤 처음 맞는 달의 첫날이었다. 어김없이 바빴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여유로웠다. '일단 해보고, 안되면 내일 해야지.' 하는 꾀도 났다. 그래서인지 여느 퇴근길과 달랐다. 그동안의 그런 몇 개의 날들을 되돌아보면 하루 종일 달리다가 일을 끝내고,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실려서 한마디도 안 하고 집에 가서 일찍 잠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퇴근을 했는데도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너지가 남아있었다. 갑자기 만나자는 친구의 제안에 응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집에 가서 떡만둣국을 끓여먹고 싶을 정도의 에너지는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마트로 향했다. 설 연휴 동안 멸치육수와 사골육수로 끓인 떡만둣국은 먹었으니, 양지육수로 끓인 만둣국이 먹고 싶었다. 고기 코너를 지나며 양지를 사서 직접 육수를 내볼까 하는 생각도 아주 잠깐 했지만, 바로 즉석식품 코너로 가서 완성된 육수를 2 봉지 담았다. 그리고 오늘 회식을 하는 남편의 내일을 위해 컨디션을 2병 샀다. 늦어도 9시에 모든 회식이 끝나는 요즘, 남편은 집에 와서 분명 맥주 한 캔을 더 할 것이다. 그리고 야식으로 나를 유혹할 것이다. 나는 새해를 맞이해 당분간 술을 끊기로 다짐했고, 다짐한 것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어엿한 성인이기 때문에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잘 절제하고 평온한 밤을 맞이할 것이다. 


중간중간 이것저것 사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잘 참았다. 나름 뿌듯해하며 카운터로 향했는데, 앞 계산대에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산 슬라임이 올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슬라임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슬라임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는데, 이상하게 슬라임을 사려고만하면 '내가 이것을 사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분명 비싼 것도 아니고, 성인들도 많이 갖고 있는데 왜인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동안 사지 못했다. 오늘도 역시나였다. 오늘은 슬라임을 사야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2층 계산대에서 슬라임을 본 후 4층까지 올라가 슬라임 코너에 도착했는데, 막상 슬라임을 보니 '내가 이것을 사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나는 이것이 문제다. 고민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대충 넘기면서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해서는 괜히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래서 그냥 샀다. 노란 반짝이가 들어있는 슬라임이다. 집에 와서 만둣국을 끓이고, 분리수거를 하고, 반신욕을 하고 일기를 쓰느라 아직 만져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나는 슬라임을 샀다. 일기를 쓰고 있는 도중에 회식을 마친 남편도 집에 도착했다. 역시나 옆에서 자꾸 나를 부른다. 나는 남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대신 옆에 앉아 슬라임을 만질 것이다. 그리고 남편의 맥주 한 캔이 끝나면 컨디션 한 병을 건넬 것이다. 


'컨디션'과 '슬라임'을 같이 샀다. 


'컨디션'과 '슬라임'을 같이 사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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