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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기 Feb 16. 2022

츄리닝에 맨발로 구두를 신는 남편

기록하는 2022년│Episode 16│2022.02.15

남편이 회식을 한다. 지난 주말 출근하면서 진행했던 팀의 큰 행사가 무사히 잘 끝났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계획되어있던 일임에도 막상 회식을 한다니까 괜히 안 했으면 싶다. 심심하다. 오늘은 이상하게 아무 일 없었는데 퇴근하려고 보니 지친다. 처진다. 이런 날은 남편이랑 맛있는 저녁 먹으면서 시원하게 수다 떨면서 이상한 기분을 날려버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저녁을 포기하지 않는다. 회사 근처 제일 좋아하는 마라탕 집에 간다. 넓적 당면, 숙주, 두부, 청경재, 부추, 문어볼, 목이버섯, 백목이버섯을 가득 담고 양고기를 추가한다. 자극적이게 먹고 싶어서 매운맛 2단계로 주문한다. 분명 혼자 먹을 건데 욕심부렸더니 22,500원이 나왔다. 


포장된 마라탕을 받아서 집에 왔다. 제일 좋아하는 '빅뱅이론'을 켠다. 3번 정주행 했다. 지금은 영어공부를 위해 영어자막으로 보고 있는데, 절반 이상을 못 알아듣다 보니 덜 재미있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마음의 가책을 덜기 위해 꿋꿋하게 영어자막으로 본다. 이렇게 보다 보면 언젠가는 듣는 귀가 뚫리거나, 또는 '빅뱅이론'이 지겨워지겠지. 둘 중 하나는 해낼 것 같다.


아무래도 심심하다. 분명 마라탕은 맛있고, 집에서 쉬는 것은 편안하고, 나는 혼자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뭔가 아쉽다. 시답잖은 것들을 나누며 깔깔대고 싶은 날인데, 집이 너무 조용하다. 오늘따라 남편의 빈자리가 크다. 아무래도 주말출근부터 이어진 남편의 부재가 큰 것 같다.


우리는 사내부부다. 같이 출근하고, 같이 퇴근한다. 심지어 현재는 같은 층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9층까지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고 올라온다. 일하다가 일어나서 뒤를 돌면 남편이 저 멀리 보이고, 업무 중 누군가 남편을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는 것처럼 남편과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에도 분명한 장단점이 있다. 그렇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고, 또 서로의 일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큰 장점이다. 그래서 남편과 같은 회사를 다니는 것에 만족하는 편이다. 


회사 근무시간과 각자의 약속과 일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남편과 거의 함께한다. 물론 내내 붙어 있고, 내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집에 와서도 저녁을 먹고 나면 각자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본다. 하지만 나누고 싶은 것이 있을 땐 언제라도 바로 함께한다. '따로 또 같이'를 함께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주는 그런 시간이 현저히 부족했다. 주말 내내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한 남편을 보고 있으면 "자기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자."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월요일에도 남편은 늦었고,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오늘인데 회식을 하는 것이다. 남편과의 수다는 언제나 내게 큰 충전이 되지만, 일정 시간 이상을 채워야 하는 것 같다. 이번 주는 여러 가지 일로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고,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 그 순간 현관문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생각보다 남편이 일찍 집에 왔다. 물론 많이 마셔서 제정신은 아니겠지만, 깔깔대고 싶은 날에는 술 취한 남편도 꽤 괜찮다. 술에 취하면 남편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본인의 멀쩡함을 주장하는데, 일단 그게 조금 귀엽다. 그리고 평소보다 액션이 화려해지는데, 그것 역시 귀엽다. 오늘도 역시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만세를 한다. 


"자기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일찍 오려고 노력했어!" 

"오구오구. 그랬어? 잘했어. 고마워. 그런데 손부터 씻어."

"웅."


손 씻으러 들어갔다 샤워까지 마치고 나온 남편이 과자가 먹고 싶다면서 편의점에 가자고 한다. 추워서 귀찮지만 같이 가야지. 남편은 그 사이에 옷도 다 입었다. 사각사각 거리는 여름 츄리닝에 정장 코트를 꺼내 입었다. 발 시려우니 양말 신으라는 말에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자기는 구두를 신을 건데, 맨발로 구두를 신어야 멋이라고 한다. 아무리 집 앞 편의점에 간다지만 츄리닝에 구두는 아닌 것 같아서 말렸는데 남편은 역시 단호하다. 이것이 멋이라고. 츄리닝에 구두를 신을 줄 알아야 진짜 멋쟁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멋이라는 것에 관심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왜 이렇게 멋쟁이에 집착하냐고 했더니 남편은 갑자기 사뭇 진지해진다.


"자기. 나는 늘 자기한테 멋쟁이이고 싶어."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남편은 진지하게 여름 츄리닝에 끝까지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로 구두를 신고 나간다. 그리고는 멋쟁이의 워킹을 보여주겠다며 한걸음 걸음마다 에지 있게 걷는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하다. 남편과의 수다는 즐겁고, 충전을 위해 필요한 할당량은 고농축으로 다 채웠다. 츄리닝에 맨발로 구두를 신는 남편이 멋쟁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넘치도록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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