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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기 Feb 15. 2022

이곳에 나만 남은 기분. 퇴사 못 한 회사원

기록하는 2022년│Episode 15│2022.02.14

이 회사에 들어온 것이 15년 10월. 16년도 5월에 현재의 팀으로 부서 이동하고 5년 9개월째 같은 회사의 같은 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회사를 들어올 때만 해도 안 해본 일에 적응하기가 어려워서 '최선을 다해서 딱 1년만 해보고, 안되면 나가야겠다.'라고 생각했다. 1년이 지날 때쯤엔 '이제 겨우 한 텀 돌았다. 한 텀은 더 돌려봐야 일을 제대로 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년은 더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매 번 크고 작은 고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회사와 이 팀에 적응을 완벽하게 한 것일까. 벌써 6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어떤 일이건 이 정도로 5년 넘게 꾸준히 한다면 꽤 큰 발전을 할 것이다. 명인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 성장하고, 그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실무에 필요한 몇 가지의 개념만을 배웠고, 일을 계획해서 성장해나가는 것보다는 실수 없이 매 달의 마감을 잘해나가는 것이 목표인 듯 일 해왔다. 다행스럽게도 주위의 평은 좋다. 이 일에 대한 고민을 할 때면 이 일은 원래 그렇게 해나가는 것이라고, 전임자의 사례를 들며 실수 없이 해나가는 것 자체가 잘하는 것이라고들 이야기한다. 그런 이야기들에 솔깃해져서 마음을 놓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여전히 너무 아슬아슬하다. 아무것도 다지지 않고 겉보기에만 예쁜 모래성을 쌓아놓은 것 같은, 작은 파도에 흔적도 없이 무너져버릴 것 같은, 그런 마음이다. 그래서 매번 퇴사와 진로 재탐색을 고민하는 것 같다.


이런 회사 생활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절반 이상이 사람이다. 나머지 절반은 급여다. 일에 대한 보람이라거나 자긍심 등은 아무것도 없다. 이 일을 더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 일을 심도 있게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실수 없이, 맡은 바 문제없이 처리하고 싶다. 물론 나와 남편이 함께 몸담고 있는 곳이니, 당연히 회사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더 잘되면 좋겠다. 그러나 딱 그뿐이다. 결국은 좋은 사람과 생활을 위한 경제활동이라는 이유만이 남는다. 


회사에는 감사하게도 좋은 사람이 많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최근 차례로 연령대가 비슷한 친구들이 2명이나 퇴사했다. 한 명은 다른 방송사로, 한 명은 게임회사로 이직했다. 능력 있는 친구들이라 언젠간 헤어지겠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빨랐고, 아쉬웠다. 유독 높은 연령대가 많은 이 회사에서 비슷한 연령대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취향까지 비슷하다니.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함께한 몇 년의 시간 동안 꽤 부지런히 추억을 쌓았다. 평일을 넘어 주말의 시간도 공유하는 사이가 된 만큼 더 아쉬웠다. 하지만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길이 있기 때문에 진심으로 축하했고, 셋 다 회사가 달라진 후에도 가장 자주 만나며 안부를 묻고 있다.


2월을 맞아 오늘도 만났다. 이태원의 난포에서 만나기로 했다. 성수동 난포는 예약이 안되고 웨이팅이 길다고 들어 가보지 못했는데, 난포 한남점은 네이버 예약이 된다길래 바로 예약했다. 월요일 퇴근길, 상암에서 이태원까지는 꽤나 복잡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간다.

<난포> 한남점. 모든 메뉴가 맛있었다. 제철회국수는 늦게 시켜 사진에 없다.

세명이지만 넉넉하게 주문한다. 돌문어간장국수, 제철회묵은지말이, 강된장쌈밥, 새우감자전, 한우수육를 시켰다. 모든 메뉴는 깔끔하고 맛있었다. 다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온지라 음식이 나오면 먹어치우기 바빴다. 나는 특히 새우감자전과 강된장 쌈밥이 맛있었다. 찬으로 나온 마늘종 장아찌와 묵은지도 맛있었다.


카페를 갈까 하다가 시간이 애매해 식당에 남기로 했다. 후식 느낌으로 제철회국수를 추가로 주문했다. 깔끔한 회국수와 함께 근황 토크가 시작된다. 코로나의 기승으로 인해 1월 한 달 건너뛰었을 뿐인데, 할 이야기가 많다. 그 사이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가 다시 걷었고, 다른 한 친구는 이직한 회사 첫 출근을 시작했다. 작년 말 이직한 다른 한 친구는 여전히 적응 중이라고 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지내고 있는 모두를 보며 다시 한번 힘을 내고,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헤어졌다.


그런데 문득, 순간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엑셀을 쓰고 있는 나에게는 친구들이 요즘 쓰고 있는 업무 툴이 생소하다. 그들의 수평적인 조직문화도, 합리적인 보상 체계도 낯설다. 흥미롭게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불쑥불쑥 나 혼자 너무 뒤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새로운 세상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익숙함을 포기 못해 도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느껴졌다. 어디선가 읽었던 개구리 이야기-펄펄 끓는 물에 개구리를 던져 넣으면 있는 힘껏 뛰쳐나와 살지만,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두고 서서히 물을 끓이면 익숙해진 개구리는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삶아져서 결국에는 죽는다-가 떠오르면서 내가 이미 삶아지고 있는 개구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무서웠다. 동시에 친구들을 보며 이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로 이미 충분히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아마도 내가 회사를 떠나려고 했다가 못 떠났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더욱 큰 것 같다. 나는 그 자리에 그냥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앞서 나가는 것 같은. 그래서 결국 내가 뒤쳐진 느낌이 든다. 나 역시 회사에 남기로 쉽게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면 괜히 그 결정이 맞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영원히 여기에 남을 것은 아니고, 또 남는다고 해도 그 나름의 의미는 충분하겠지만, 나만 너무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다시 또 고민이 된다. 이곳에 나만 남은 기분이다.


이럴 때일수록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오히려 명확하다. 내가 꿈꾸는 일에 가까워지기 위해 뭐라도 하나 더 하는 것. 하나라도 해보고, 해내는 것. 그래서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것. 걱정하고 고민하는 대신에 하는 것.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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