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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기 Feb 17. 2022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처방전처럼

기록하는 2022년│Episode 17│2022.02.16

18일 수술을 앞두고 있다. 당일 입원해 수술하고, 별일 없으면 당일 퇴원할 예정이다. 하루 이틀의 휴식 후 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작은 수술이다.


하지만 평생을 병원과 최대한 멀리서 살아온 나는 조금 무섭다. 내 몸 안에 제거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도 무서운데 심지어 전신마취라니. 건강검진 때 하는 십 분의 수면 내시경도 가끔 떨리는 나인데, 전신마취라니. 그 단어를 들은 날부터 순간순간 무서운 생각들이 머리를 스친다.


수술을 계획한 후 한동안 긍정적이고 감사한 날들이었다. 생명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큰 혹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술을 위해 불필요하게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될 정도도 아니다. 그냥 잘 제거하고, 잘 회복하면 된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이 정도의 일에 무서움을 느낄 만큼 삼십 년 넘게 병원의 무서움을 모르게 건강하게 잘 살아왔다. 얼마나 감사한가. 쓸데없는 걱정 대신, 하루하루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보내자고 생각했다.


내일은 오후 반차를 내고 병원에서 입원 전 코로나 PCR 검사를 받을 예정이다. 그리고 수술 전에 집에서 먹어야 하는 약도 구입해야 한다. 지난 진료 때 처방전을 받았는데, 회사로 돌아오는 시간에 쫓겨 구입하지 못했다. 내일 병원에 가는 김에 약을 구매해야겠다. 그러려면 처방전을 잘 챙겨가야 한다. 잘 챙겨둔 서류 뭉치에서 처방전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이런. 처방전이 2월 9일까지 유효하다고 한다. 이미 유효기간을 일주일 넘게 넘겨버렸다. 내일 병원에 가서 다시 처방전을 받아야겠다. 반차를 냈는데 조금 쫓길 수도 있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에 문의 전화를 한다.


"안녕하세요. 제가 약 처방전을 받았는데요, 유효기간이 지나서요."

"네. 처방전은 교수님 진료받고 발급받으실 수 있어요. 가장 빠른 진료 가능일이 (다음 주) 월요일인데, 예약 잡아드려요?"

"제가 수술이 이번 주 금요일인데요.."

"아.. 그렇다면 수술 당일날 오셔서 확인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 약을 수술 전날 밤에 먹으라고 했는데요..."

"아.. 처방전은 교수님 진료받으셔야 발급받을 수 있는데.. 일단 오늘은 진료 시간이 끝나서 연결이 어렵고 내일 코로나 검사받으러 오실 때 직접 가셔서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저희 쪽에서는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네.. 감사합니다."


대화를 마치고 내가 너무 한심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나 스스로가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난 왜 이럴까.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애써 괜찮은 척하려고 외면했던 것일까. 기억하지 않아도 될 자잘 자잘한 일들은 수만 가지 붙들고 있으면서, 왜 이렇게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놓아버린 걸까. 


퇴근하는데 나의 수술 사실을 아는 한 선배에게 내 멍청함에 대해 하소연했다. 선배는 별 문제없을 거라고, 약 잘 구매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네 인생을 너 지금 회사 생활하는 것만큼만 해."


그 말을 듣는데 머리를 한대 쾅 맞은 것 같았다. 나는 내 인생을 회사 생활보다도 덜 신경 쓰며 살았다. 나 자신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내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실제로는 회사 생활에 함몰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보람되거나 성장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 안 듣고, 실수 안 하려고 하루를 버텨온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 채 일단 뛰라고 하니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만 왔던 것이다. 


내가 가장 잘 챙겨야 하는 나 자신인데, 왜 나는 나를 제일 쉽게 생각하는 걸까. 한 번 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니, 그 생각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계속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나 스스로를 너무 쉽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애써 안 좋은 생각들을 지운다. 


나는 잘 해낼 것이다. 내일 별 일 없이 약 처방을 새로 잘 받을 것이고, 코로나 PCR 검사도 잘 받을 것이다. 금요일에는 마취도 잘하고, 수술도 잘 받을 것이다. 불필요한 혹을 잘 제거하고, 회복도 잘해서 지금보다 훨씬 더 건강한 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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