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자기 Feb 22. 2022

하다 보면 되겠지, 책상 조립 (난 왜 가만 못 있지)

기록하는 2022년│Episode 22│2022.02.21

오늘까지 휴가다. 역시 월요일 휴가는 최고다. 평소라면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창문을 가득 채우는 햇살에 눈이 부셔 일어난다. 알람도 울리지 않았다. 햇살 가득 맞으며 일어나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요즘같이 해가 짧을 때는 특히 더 소중한 시간이다. 제시간에 출근하려면 해뜨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새벽인지 아침인지 모를 컴컴한 방 안에서 기지개 켤 시간 없이 마구잡이로 울리는 알림을 겨우 끄고 우당탕탕 일어나서 바로 화장실로 향한다. 회사에 도착할 때쯤 떠오르는 해를 마주한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잠에서 깨고 나서도 한참을 이불속에서 뒹굴거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일어나서 여유롭게 기지개를 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휴가는 좋다.


특히 오늘같이 '수술 후 회복'과 같은 구체적이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유로 인해 낸 휴가는 조금 더 특별하다. 귀한 휴가이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명확한 핑곗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회사원에게 휴가는 굉장히 소중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휴가를 내고, 낸 휴가의 남은 시간에 맞춰 다른 해야 할 일들을 더 끼워 넣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아무 일 없이 휴가를 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오늘의 휴가가 특별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잘 먹고, 잘 쉬는 것에만 집중해야지.


사실 어제까지는 오늘 하고 싶은 일이 무척 많았다. 우선 집 앞 도서관에 가보고 싶었다. 이 도서관 근처로 이사한 지 3년이 넘었는데 매일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여태 한 번을 못 갔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아기자기한 외형이 그림책이 많을 것만 같다. 또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도자기 공방 원데이 클래스도 듣고 싶었고, 발레를 배워볼까 하며 집 근처 발레 학원 2-3곳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그런데 원데이 클래스를 예약하려는 순간, 아무것도 해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한 회복을 위해 회사까지 쉬면서 정작 몸을 돌보지 않고 바삐 돌아다닌다는 것이 아무래도 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 계획도 하지 않고,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여유롭게 씻고, 따뜻한 물 한 잔을 한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진다. 오늘 점심에는 호박죽을 먹어야지. 냉동해둔 호박죽을 꺼내 해동한다. 오후에는 커피도 한 잔 내려 마시며 밀린 드라마를 봐야겠다. 충실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쉬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그 순간 한쪽 벽에 쌓아둔 택배가 보인다. 지난주 목요일 배송되었는데 수술 후 바로 엄마 집으로 갔다가 어젯밤에 오느라 아직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이다. 내용물은 책상이다. 작년 10월 이사하면서 서재를 만들고 싶었는데, 방 구조와 나의 계산 착오와 기타 등등의 이유로 만들지 못했다. 집에 테이블도 많기 때문에 별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난주에 일기를 쓰다가 아무래도 책상이 따로 필요할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던 것이다. 


조립과 같은 것에 별로 재능이 없는지라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완성된 테이블 위에서 일기를 쓰고 싶었다. 한 번 조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택배 상자를 뜯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우선 상자 한 개만 열어보기로 한다. 상자를 뜯었더니 집이 어수선해진다.

이렇게 된 것 다 뜯어서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정리해보기로 한다. 

상판을 들어서 거실로 옮기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무겁다. 그냥 작은 방에서 마저 정리하기로 한다. 수술을 당분간은 힘을 쓰거나 쪼그려 앉는 자세를 피하라고 했는데, 책상 조립에는 딱 그 두 가지만 필요하다. 어떡하지. 그냥 여기에서 그만두고 기다릴까. 딱 봐도 잘 모르겠는데, 괜히 두 번 일 하는 것보단 조금만 참으면 되는 것 아닐까. 어지러운 작은 방을 두고 안방 침대에 누웠다. 그래 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자꾸 옆방에 널브러져 있는 책상 구성품과 상자와 전동드릴이 생각난다. 그래 다리만 달아놓아야지.

설명서대로 우선 보강 프레임과  다리 두 개를 렌치로 조립한다. 잘 못할 것 같았는데, 벌써 반이나 했다. 마저 마무리해야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 눈에는 벌써 그럴싸하다. 만들어진 다리를 상판에 고정시킨다.

아빠가 선물해 준 전동드릴로 나름 멋있게 8개의 못을 박는다. 책상이 완성되었다. 만들어진 책상을 뒤집는 것에 생각보다 너무 큰 힘이 필요했지만 어쨌든 나름의 서재도 완성했다. 수평을 제대로 못 맞췄지만, 이런 것에 소질이 없는 나는 이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처음 상자를 열었을 때 무척 막막했다. 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하나씩 하다 보니 어쨌든 조립은 끝냈다. 별 것 아닌데 꽤 뿌듯하다.

아직 의자 안 오고, 서랍장도 안 오고, 컴퓨터도 없다. 그래서 휑하다. 하지만 일기 쓰기를 위한, 앞으로 무엇인가 해나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 같아 만족한다. 이곳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할지 기대된다. 짐을 쌓아 놓는 창고 방만되지 않기를 바란다.


책상 조립으로 나의 가만 못 있음 병이 시작됐다. 책상 조립을 끝내니 그동안 미뤄뒀던 집안일들이 보인다. 세탁바구니에는 세탁물이 가득하고, 연이어 내린 눈으로 현관은 엉망진창이다. 옷방에는 개지 않고 둔 옷들이 산을 이뤘다. 우선 노래를 크게 튼다. 그리고 하나씩 해 나간다. 4번에 걸쳐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린다. 그 사이 옷방에 쌓아둔 옷을 갠다. 옷은 옷장에 속옷은 서랍장에 수건은 수납장에 넣는다. 현관도 닦는다. 우선 물을 뿌려 때를 불리고 수세미로 문지른다. 그리고 걸레로 먼지 물을 닦는다. 이 과정을 2차례 더 반복한다. 현관이 깨끗해야 복이 들어온다는데, 더러운 현관을 보며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깨끗해진 현관을 보니 다 잘 될 것만 같다. 침대 매트도 빤다. 빨아둔 매트를 깔고, 깔고 있던 매트를 세탁한다. 냉장고 속 오래된 음식도 정리한다. 다 정리하고 보니 10L 음식물쓰레기봉투 2개가 나왔다. 엄마가 사준 식재료들이 대부분이다. 음식을 버린다는 것은 언제나 큰 죄책감이 드는 일이다. 그런 마음으로 버려야 할 때를 놓친 식재료들이 냉장고 한가득이었다. 이제는 절대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더 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정리한다. 화장실도 청소한다. 닦아도 닦아도 물 때가 자주 낀다. 매일 샤워하고 나오면서 정리하면 될 텐데 나나 남편이나 그렇지 못하고 꼭 이렇게 몰아서 청소한다.


정리하다 보니 커피도 못 마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둘러 커피를 내리고, 같이 먹을 크로와상 생지를 에어프라이어에 굽는다. 늦었지만 혼자만의 티타임을 갖는다.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는데, 결국 집안일만 가득해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자기 클래스라도 다녀올걸 그랬나 싶다.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안 해야지 하는 순간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받는다. 컴퓨터 앞에 다시 앉는다. 급한 일을 처리하고 나니 휴가 낸 이틀간 쌓인 일들이 보인다. 내일 회사에 출근해서 해도 되지만, 내일의 나를 위해 몇 개라도 해놓기로 한다. 어느덧 5시다. 이대로라면 저녁까지 업무를 할 것 같아 정리하고 일어난다. 


이제 진짜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데도 안 나가고 평화로운 저녁을 맞이해야지.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흘러가는 내 휴가가 아깝다. 평소에 가고 싶었던 식당-평일이 아니라면 예약이 어려운 식당-들이 떠오른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평소 리스트업 해놓았던 식당 중 당일 예약이 가능한 곳을 찾는다. 찾았다. 그리고 예약했다. 남편한테 카톡을 보낸다.


"오늘 저녁 외식 예정. 6시 20분까지 회사 앞으로 갈게!"

"외식? 자기 오늘 침대 밖으로 한 발도 안 나올 거라며? 암튼 알겠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


남편을 픽업해서 식당에 도착했다.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양껏 시켰다. 

<멜팅샵X치즈룸 광화문 디타워점>에 방문. 얼그레이 토마토 카프리제, 명란 대파 크림 파스타, 전복 솥밥 리조또를 시켰다

다 만족스럽다. 후식까지 시켜 알차게 먹었다. 후련하다. 역시 집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팝콘 소금 아이스크림. 딱 생각하는 그 맛이다. 아무래도 이곳의 디저트 원픽은 바스크 치즈케이크(산 세바스챤 오리지널)다.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남편이 외친다.


"현관 청소했어?"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다. 


"설마 책상도 조립했어? 했네. 빨래도 했어? 했네. 아이고. 내가 하기로 했잖아. 오늘 아무것도 안 하고 쉰다며. 맛있는 거 먹고 햇빛만 본다며. 고생했어. 몸은 괜찮아? 아이고. 아이고.. 자기."


아.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결국 오늘도 보지 못한 <스물다섯, 스물 하나>가 생각난다. 왜 나는 도대체 가만 못 있는 거지. 

작가의 이전글 평범한 일요일의 작은 기록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