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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기 Mar 15. 2022

화이트데이가 뭐라고 마음이 상하나. 조금 창피한 기분

기록하는 2022년│Episode 42│2022.03.14

우리는 평소 '무슨 무슨 데이류'는 잘 챙기지 않는다. 그냥 늘 먹는 저녁을 조금 신경 써서 먹어보자는 정도다. 이것도 바쁠 때는 넘어갈 때도 많다. 공식적으로 챙기는 날은 일 년에 딱 5일, 각자의 생일, 처음 사귀기로 한 날, 결혼기념일, 부부의 날이다. 이 날에만 선물을 주고받고, 좋은 곳을 예약해서 보낸다. 물론 갑작스럽게 챙기는 날도 있다. 날씨가 좋은 날, 기분이 좋은 날, 그냥 챙기고 싶은 날 등.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데이'를 챙기지는 않는다. 결혼을 하면서 내가 제안했고, 함께 결정한 내용이다. 돈도 아깝고, 먹을 것에 취향이 확실한 내가 남편으로부터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받았을 때 처치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적어놓는 이유는 뒤에 내가 느낄 서운함이 서운할 이유가 하나도 없음을 나 스스로 다시 한번 깨닫기 위함이다.)

 

오늘은 화이트데이다. 중요한 날은 아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아무 날도 아니다. 저녁때 남편의 축구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저녁 때는 간단하게 떡볶이를 먹기로 했다. 그런데 출근했더니 팀장님께서 화이트데이라고 마카롱을 선물 주셨다.

맛있게 먹다가 갑자기 남편은 뭐하나 싶었다. 물론 이런 날을 챙기지 않기로 했지만, 지난 밸런타인데이 무렵에는 남편이 마침 달지 않은 초콜릿을 사무실에 두고 싶다고 해서 기라델리 다크 카카오 72%와 86%를 각각 한 봉지 선물했다. 그래 놓고 이렇게 입을 씻는단 말인가. 심지어 오늘은 남편의 동아리 모임 때문에 저녁도 제대로 못 먹는데. 갑자기 '화이트데이에 축구를 가?' 하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워워. 분명 남편은 허락을 구했고, 나는 아주 기분 좋게 허락했었다. 이래 놓고 갑자기 서운하다니. 스스로 잘못된 생각임을 안다. 아직 아침이니까 퇴근시간까지 조금 기다려보기로 한다. 


퇴근시간이 됐다. 남편의 일이 밀려 퇴근이 조금 늦었다. 만난 남편은 얼핏 봐도 빈손이다. 남편한테 묻는다.


"사탕은?"

"내가 원래 4시쯤 나가서 사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너무 바빠서 못 샀어. 미안해"

"핑계 대지마. 진짜 사려고 했으면 점심시간에 샀어야지. 흥. 됐어.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


회사 앞에서 떡볶이를 맛있게 먹고 계산하려는데 남편이 말한다.


"오늘은 내가 용돈으로 쏠게! 화이트데이니까!"

"됐어. 이렇게 얼레벌레 넘어가려고 하지 마. 흥."


남편은 얼레벌레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상하게 여전히 서운하게 느껴졌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서운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한 번 서운함이 느껴지니 그 서운함이 자꾸 커진다. 


남편을 축구장에 데려다주고 집에 와서 씻는다. 왜 이런 걸로 서운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하면 될 것을 왜 계속 빙빙 돌려가며 툴툴거리는지. 참 내 마음이지만 알 수 없다. 


남편 운동시간이 끝날 때쯤 맞춰서 다시 축구장으로 남편을 데리러 왔다. 남편이 고맙다며 이런 부인이 어디 있냐고, 본인은 정말 복 받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집 앞 슈퍼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남편이 과일이 먹고 싶다고 차를 좀 세워달라고 한다. 평소 과일을 챙겨 먹지 않는 남편이라 의아했지만 이내 알겠다고 한다. 혹시 사탕을 사려는 건가. 귀엽군. 남편은 굳이 가방까지 꺼내간다. 나름 치밀해 보인다. 모른척해줘야지.


집에 왔다. 남편이 가방에서 오렌지를 꺼낸다. 오렌지뿐이다. 남편에게 묻는다.


"사탕은?"

"...."


남편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진짜 오렌지가 먹고 싶었던 것이다. 사탕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갑자기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서 사 오겠다고 한다. 됐다. 나는 사탕이 먹고 싶은 것이 아니다. 뭐 대단한 선물을 받고 싶었던 것도 진짜 아니다. 그냥 마트에서 파는 막대 사탕 하나였으면 충분했다. 바쁜 하루였겠지만, 잠깐이라도 내 생각을 했을 남편의 그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사탕을 못 받았다고 남편이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그냥 그런 사람인 것이다. 비록 사탕 몇 개를 챙겨 오는 센스는 약간 부족하지만, 그것을 제외한 모든 날들에서 충분히 남편의 사랑을 느낀다. 남편의 부족한 센스마저 충분히 귀엽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괜히 남편의 센스 없음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렇다고 혹시라도 남편이 내 이런 마음을 잘못 이해하면 큰일이다. 사탕을 못 받아서, 선물을 못 받아서 서운하고 속상한 것처럼 느끼면 다음번에는 또 과한 일이 생길 수 있다. 남편을 앉혀놓고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왜 서운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내 마음이 잘 전달되었는지, 남편이 잘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 구구절절 쓸 필요도 없다. 나는 그냥 사탕을 못 받아서 삐진 것이다. 화이트데이가 뭐라고 마음이 상하나. 조금 창피한 기분이다. 




오늘 아침. 그러니까 화이트데이 다음 날이다. 출근해서 가방을 여는데 작은 봉투 하나가 들어있다. 

남편의 편지와 용돈이 들어있다. 


"사랑하는 자기에게. 자기 안녕? 화이트데이에 작은 사탕 하나도 준비하지 않은 나에게 많이 서운했지? 생각을 하고 준비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치니까 이게 잘 안되네. 미안해요... (어쩌고)(저쩌고)... 그럼 이만"


뉸물이 핑 돈다. 어제 남편을 앉혀놓고 다다다다다 서운했던 내 마음을 전달하고 나는 편하게 잤다. 오늘 아침에도 아무 생각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아마도) 늦은 시간까지 고민하다가 저렇게 편지를 쓴 것이다. 남편의 편지 한 장에 나는 아침부터 세상 또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정말 단순하고 동시에 무척이나 피곤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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