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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euN 쓴 Nov 16. 2022

가슴 뛰는 일은 많아.

대사 여섯 마디의 데뷔

스무 살에는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시절이 있었다.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했고, 누구든지 같이 하자고 하면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고 하는 편이었다. 다양하게 해 보면 그 경험만큼이나 나의 스토리가 쌓여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모든 일을 '하자' 하고 덤비고 보니 하루 스케줄을 정말 최악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쌓여 일주일을 보면 더더욱 최악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연기를 하는 공연이라는 것도 그때 하고 있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하나였다. 처음 시작은 우연한 기회로부터 였고, 어렵지 않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 무대에 올라간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이후 얼마간의 연습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들은 조금 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외모적으로 나은 사람이었고,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었고, 목소리가 좋아 어떤 역할을 맡겨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이에 상관이 없었다. 20년 전, 공연단에는 20살부터 40살까지 나이도 다양하게 있었다. 그러니 나에게까지 올 기회는 없었다. 물론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목소리가 좋아서 나에게 딱 맞는 배역을 잡을 수도 없었다. 노래는 음치를 타고난 터라 끼어들 수 없는 능력치였다. 


'나'라는 이상한 사람은 이상한 것에 꽂혔다. 못하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 이 십 대에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한번 그곳에서 주인공 역할을 해보고 싶어졌다. 굳이 도전하는 정신이 아름답다는 말로 포장해 보고 싶었다. 안 되는 것을 알면서 도전하는 것이 정신 승리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의 입신양명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구차하게 설명을 하면 그렇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엉망의 스케줄 속에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 열심히 할 수 없었다. 한정된 시간과 체력에서 나오는 열정은 오히려 나의 집중력을 망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진짜 친구를 사귈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떤 모임에서든 주인공이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냥 프로 참석러 였다. 참석을 못하게 되면 보고 싶다고 연락은 오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냥 다른 곳에 있겠지 하며 넘기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이곳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떠도는 사람이 되었다. 


진심으로 편해진 곳이 바로 극단이었다. 공연을 하러 모인 곳에서 공연 이야기보다 살아온 이야기를 더 많이 물어 봐 주었다. 신이 나사 이야길 하다 보면 어느새 연습 시간이 끝나 있었다. 물론 공연이 임박해지면 연습하느라 사담을 주고받을 수 없지만 연습의 시간 외에도 많이 만나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편해지는 곳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형이 되었고, 누나가 되었다. 친형이 없고, 누나가 없는 나에게 형과 누나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좋아서 시작한 일에서는 능력이 오르지 않았다. 전혀 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가 들렀지만 나아지는 것 없이 무대 뒤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앙상블에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실력이 미치지 못해서 잘하는 사람이 옆에서 항상 같이 불러주면 따라 하기 급했고, 그가 불러주는 노래를 녹음해서 그대로 소리는 내는 것만 할 수 있는 앵무새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좋고 하는 일이 좋아서 늘 하는 동안 행복했다. 좋은 기억의 한 페이지를 간직한 채 나는 호주로 훌쩍 떠나 일 년의 시간의 보내고 돌아왔다. 


돌아오니 극단은 몸집이 많이 작아졌다.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고,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없었다.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대로였기에 나는 다시 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전에 하던 일을 이어서 할 수 있었다. 앙상블의 소리에 한 명의 몫을 더하는 일과 잡다한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곧 나는 그 일에 적응을 했고, 일 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금방 스며들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생겼다. 


좋은 기회라는 것이 바로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아직 나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무대 뒤에서 음성으로 연기를 하면 무대에 서 있는 사람이 나의 대사를 받아 연기를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받게 하는 것이 나의 첫 대사였다. 연습을 하고 또 했다. 한 줄의 여섯 마디밖에 되지 않는 대사지만, 톤을 바꾸어 가며 연습했다. 안 보고 할 수 있었지만 대본을 항상 들고 다니면서 연습을 했다. 


연습이 시작되면 그 대사가 나오는 앞 장면과 대사 이후의 장면의 대사를 외웠다. 내가 하는 대사 전에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내가 하는 대사 이후에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한 줄의 대사를 받고 나서 몇 달의 연습을 했다. 내가 나오는 일 초의 장면보다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을 위해 나도 연습에 참여해야만 했다. 그게 규칙이었다. 내가 나오지 않는 장면에서도 그 사람들의 연기를 보며 연습을 해야만 했다. 


학교를 마치면 연습을 했고, 주말도 없이 연습을 했다. 이젠 그 대사를 자다가 일어나서 써보라고 해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연습을 했고, 한 줄 남짓의 대사의 전달이 그렇게 감정을 많이 넣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처음 극단을 시작했을 때는 종교적인 공연을 하는 팀이라 대사도 그렇게 어렵거나 힘들지 않았다. 


"모세의 율법에도 돌로 치라고 되어있지 않소!!"라는 문장이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대사를 위해 몇 달간 연습하고, 공연 무대에 올라 검은 커튼 뒤 쪽 피아노 아래에 엉덩이를 대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의 차가운 온도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내 대사 앞에도 대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내 뒤에 이어서 대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내 차례가 되자 금속 마이크에 대고 크게 외쳤다. 


"모세의 돌에도 그를...  율법에도 돌로 치라고 되어있지 않소!!"라고 해버렸다. 


그렇게 짧은 일 초는 지나갔다. 아니 삼 초가 되어 지나갔다. 


이게 나의 첫 대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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