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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번역가 Oct 20. 2023

또 하나의 브런치북을 완성하며...

브런치북 대상에 응모할 요량으로 9월 초부터 몇 년 전에 써 둔 브런치북의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말이 수정이지 거의 다시 쓰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때 내가 저런 원고를 브런치북으로 발행했었나 싶어 낯이 뜨거울 정도였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내가 늘 동경하던 젊은 감각의 감성적인 에세이다운 글을 써보겠노라 다짐했지만, 그게 다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지난 10년을 더듬어가는 작업은 더 이상 젊지 않은 나를 상기시키는 듯했고, 브런치북이고 뭐고 누가 이걸 읽는다고 하루에 몇 시간씩 쓰고 앉았냐 싶기도 했다.


원고의 형식은 프리랜서가 되기까지를 '제0년'이라는 제목으로 한 꼭지, 그 후 각 1년을 1꼭지에 담는 것이었다. '제1년'부터 매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다 보니 잊혔던 사람, 감정, 사건 따위가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2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가 생각났고, 아빠를 보내드리고 미국으로 오는 공항에서 나를 배웅하던 엄마의 모습이 보였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우울하던 날들의 내가 떠올랐고, 내가 이룬 크고 작은 성취들이 기억났다.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지난 10년을 정리하는 시간을 보냈다. 내가 추억을 곱씹지 않는 편이라 신선한 경험이었다. 또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희한하게도 향후 10년이 기대되는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느낌이었다. 글쓰기란 오묘했다.


9월 초에 시작해 거의 한 달 반을 붙들고 있었던 브런치북을 발행하고 나서 한 가지 깨달음이 왔다. 내게 출판번역을 시작한 이후부터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려는 의지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의지로 브런치북을 완성했다. 또한 브런치북의 완성은 돈 벌기가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출판을 속는 셈 치고 시작한다는 초라한 마음에 근육을 좀 붙여 주었다. 그래서 10년 전에 프리랜서로 자리 잡겠다며 그렇게 마음 고생 하고서는 정확히 10년 뒤에 또 그 모험을 하고 있다는 아이러니에 기가 눌려 있는 내가 한국 갈 날이 12일밖에 남지 않았고 절차상 필요한 서류도 다 준비된 마당이니 기왕 하는 거 잘해 보자고 다짐할 수 있었다.


다른 한 가지는 내 노력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최면을 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99개의 선플이 있어도 1개의 악플밖에 안 보인다는 어느 팟캐스트 게스트의 말을 듣고는 여기에 그런 사람 또 있다고 손을 번쩍 들 뻔할 정도로 나는 중증 완벽주의 병자다. 어제 2개월가량 묻어두었던 번역 원고를 다시 꺼내 퇴고를 시작했다. 그런데 수십 시간을 들인 작업물이 또 다른 수십 시간을 들여야 할 것처럼 부족해 보여서 한없이 가라앉는 마음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이런 원고를 출간해도 될까? 독자 불만이 쏟아지지 않을까? 독자가 있기나 할까? 끊임없는 불안에 자꾸 휴대폰으로 손이 갔다. 몇 번이고 작업을 멈추고 휴대폰에 설치된 단골 앱들을 들락거리다가 급기야는 휴대폰을 꺼둘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엄청 불안하구나 하는 자각이 일었다. 그러고는 '수십 시간의 내 노력을 부끄러워하지 말자'라고 속으로 되뇌다 보니 내 원고에서 예쁜 구석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끄럽지 않은 제 브런치북 고립 탈출 프로젝트의 탄생을 소개합니다. 기대, 우울, 기쁨, 즐거움, 불안, 죄책감 따위의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겪은 프리랜서의 지난 10년을 담은 책입니다. 제 인생이 10년 주기설에 지배당하나 싶게 10년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사십에 시작한 프리랜서 생활이 올해로 10년이 되었고, 지금은 향후 10년을 계획 중이니 말입니다. 브런치북을 쓰면서 과거를 되돌아보니 스스로 대견하게 여길만한 뿌듯한 성취가 많았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또 프리랜서 생활이 주도적이지 못 했던 데다가 사회적 고립을 자초했다는 생각에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프리랜서 생활 1부의 기록으로 보면 정확할 이 브런치북을 마감한 것이 기쁘고, 또 다른 '제1년'을 시작한 것에 마음이 설렙니다. 앞으로도 계속 기록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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