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되었던 세상의 급진적 확장

by 어느 번역가

안정이라는 울타리, 그리고 보이지 않던 불안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의 주된 관심사는 안정성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번역 시장이 급변했다. 기계 번역의 급물살 속에서 7~8년간 꾸준히 협력해 온 주요 클라이언트의 일감이 서서히 줄더니, 새로운 일감을 따내기 위한 경쟁은 컴퓨터 앞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치열해졌다.


단순히 수입 감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나의 존재론적 불안감을 자극했다. 인간 번역가로서 나의 전문성이 설 자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 말이다. 일이 년 방황의 시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저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나는 번역 아카데미에 등록하는 등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애썼다. 심지어 직접 한국에 건너가 출판사를 등록하고 휴대폰을 개통하는 좌충우돌의 과정도 겪었다. 그 절박한 과정 속에서 나는 한영 번역으로 다시 방향을 잡았고, 마침내 생성형 AI를 적극적인 파트너로 활용하며 ICT & ESG라는 기회의 틈새시장을 발견하게 되었다(언젠가 이 이야기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틈새시장에서 상반기 일감이 미리 채워질 정도로 전문성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모든 신경은 이 소중한 기반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방어적인 자세를 한껏 취하고 있었다. 마음 한편에는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지만, 지금의 안정에 만족하며 다가올 10년을 안전하게 버텨내는 것이 더 현실적인 목표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안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는 그렇게 세상의 변화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뜻밖의 만남, 그리고 확장

생성형 AI와의 본격적인 협업은 이 안정 지향적인 관점을 부수는 계기가 되었다.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AI가 내놓은 첫 결과물은 나의 의도와 한참 동떨어져 있었고, 나는 AI의 한계와 나의 무력함을 동시에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실패가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파트너로 인식하게 만든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파트너가 생기자 생각의 지평이 달라졌다. 번역가로서 십수 년간 복잡한 문서의 구조를 파악하고 논리를 재구성해왔던 나의 경험이 AI라는 강력한 실행 파트너를 만나자 시너지를 내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그저 상상에 머물렀거나 카톡에 적어두고 잊어버렸던 미약한 아이디어들을 이제는 아이디어 저장 자동화 같은 실제 시스템으로 구현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흩어지던 생각들은 손쉽게 지적 자산으로 쌓여갔고, 과거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주 2회 글 발행이 현실이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내가 하는 일을 이론적 개념이나 프레임워크로 체계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내가 프로세스 설계자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 진짜 순간이 아닐까 한다.


가능성의 지평이 넓어진 지금

안정에 머물던 나의 세상은 이제 다음에 무엇을 만들까?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처음 나의 목표는 번역 작업의 일관성을 위한 RAG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작업하다 보니 진짜 시급한 페인포인트는 AI와의 대화에서 맥락이 끊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목표했던 RAG 구축에 앞서, 더 근본적인 확장 메모리 시스템 구축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는 흩어진 대화 기록과 지식을 AI가 기억하게 만드는 핵심 기반으로, 당장 나의 글쓰기와 리서치 효율을 높이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지금, 진짜 질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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