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미술관에서 일할 수 있다면

by 어느 번역가

이번 한국 방문길에 새로 원시 안경을 맞췄다. 점점 더 연로해 가시는 엄마를 보면서도 나의 늙음은 잘 느끼지 못했는데, 안경을 맞추고 나니 새삼 내가 그만큼 늙었구나 싶다. 물론, 덕분에 휴대폰 글씨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보인다. 한동안 재미를 붙였던 필사도 글씨가 겹쳐 보여 몇 개월간 중단했었는데, 이제 맘껏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새로운 안경이 나의 물리적 시야를 선명하게 만들어 준 것처럼, 어쩌면 나의 일하는 공간도 복잡했던 생각을 더 명료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글에서 함께 일하는 충족감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서울에서 다시 한번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을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 코워킹 스페이스를 다시 찾았다. 역시나였다. 군더더기 없는 긴 데스크, 적당한 소음, 그리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 역시 시간의 흐름을 잊을 만큼 깊은 집중 상태에 빠져들 수 있었다. 나처럼 자기 일에 깊이 빠져든 사람들 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최고의 몰입 환경을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일하기 좋다는 카페를 몇 군데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코워킹 스페이스의 잘 기획된 공간과 그 특유의 몰입 에너지를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커피 한 잔에 조각 케이크를 시키며 눈치를 보느니, 차라리 이 몰입감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집중을 위한 답은 찾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코워킹 스페이스는 몰입하기엔 완벽했지만 문득 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돈할 여유도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나는 감각적인 카페나 코워킹 스페이스처럼 군더더기 없고 조용한 공간을 선호하는데, 거기에 더해 영감을 주는 무언가가 함께 있다면 어떨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 곳이 있었다. 작은 미술관이었다.


비록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진 않지만, 서울에 오면 꼭 미술관을 찾는다. 미국에서도 메트로폴리탄 같은 거대한 컬렉션을 둘러보았지만, 내 취향은 부암동의 환기미술관처럼 고즈넉하고 아담한 공간에 더 끌린다. 작년에 그곳에서 김환기 화백의 뉴욕 생활을 담은 일기를 읽으며, 타국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그의 고뇌와 외로움에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 고요한 전시실 중앙에 데스크를 놓고 일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진다.


나의 완벽한 일터는 결국 코워킹 스페이스의 몰입 에너지와 미술관의 고즈넉한 영감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새 안경이 겹쳐 보이던 글씨를 선명하게 만들었듯, 이번 워케이션 실험은 나에게 맞는 일터의 두 가지 요소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올해도 나는 작은 미술관을 찾았다. 부암동의 석파정 서울미술관이었다. 천경자 화백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녀 역시 김환기 화백처럼 미국으로 떠났던 화가였다. 그녀의 고뇌를 더 알고 싶어 책을 찾아봤지만 없어서 아쉬웠다. 부채꼴 무늬 벽지가 인상적인 전시실은 마치 서양 고택의 어느 방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만약 이곳에 작업실을 갖게 된다면 어떨까. 두말할 것 없이 완벽한 장소였다. 일하다 머리가 복잡해질 때 단 몇 걸음만 나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석파정 정원을 거닐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을 테니까.


결국 내가 찾는 이상적인 일터는 명확해졌다. 그것은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에너지와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고요한 자연이 공존하는 곳이다. 나의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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