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원두막] 액션 영화에서 읽는 트렌드의 흐름
1편에서 액션 영화의 시작과 변화 과정을 보면서 역사적 흐름과 트렌드의 변화가 영화에 정말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제 2편에서는 거기에 더해 이전의 트렌드가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다룹니다. 그럼 레디, 액션! (1편을 안보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
80년대 즈음 전 세계적인 호황이 유지되었고 덕분에 이전에 비해 비교적 긍정적인 사회 분위기가 퍼져있었습니다. 여유로워진 형편 때문이었을까요?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는 융합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인종을 넘어 슈퍼스타가 된 때도 이때이고, 여러 장르가 섞인 '짬뽕' 음악이었던 힙합이 메인스트림으로 떠오른 것도 이 시기입니다. 영화계에서도 흑인 배우들이 주연을 맡아 이름을 날리기 시작합니다. <비벌리힐스 캅>으로 유명해진 에디 머피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자, 살림이 넉넉해진 가족들이 저녁에 모여 같이 외식을 합니다. 그리고 갈만한 곳은? 바로 극장이죠!
80년대 극장의 관객들은 나날이 늘어갔고, 영화사들은 가족 단위로 몰려드는 관객들을 잡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 시기에는 남녀노소 모두 볼 수 있는 액션 코미디 영화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때 <고스트 버스터즈> 나 <백투저 퓨쳐> 같은 명작 시리즈들이 탄생했습니다. 이렇게 대세가 된 액션 코미디 장르에서도 독보적인 인물이 있었는데요, 바로 성룡입니다.
이소룡이랑 비슷한 이름에 실제로 이소룡 영화에서 스턴트를 맡으며 영화를 시작한 성룡! 그러나 그의 스타일은 선배 이소룡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놀라운 신체 능력으로 스턴트를 직접 소화한 건 비슷하지만, 성룡은 액션 코미디에 최적화된 배우였던 거죠.
초고속으로 합이 딱딱 맞는 액션신과 지형지물을 200% 활용하는 웃음코드는 전 세계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기에 딱 맞는 요소들이었죠. 그런데 잠깐... 이 내용 어디선가 읽은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1편에서 다룬 버스터 키튼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경제 호황으로 다양한 관객들과 넉넉한 자본 아래 스턴트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능력 있는 배우의 출현까지. 놀라울 만큼 유사점이 많은데요, 실제로 성룡도 버스터 키튼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성룡 영화 중에는 버스터 키튼을 오마주 하는 장면도 굉장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 시계탑 장면인데요, 정확히 50년 정도의 텀을 두고 똑같은 트렌드가 반복된다는 게 오싹하리만치 놀랍습니다.
물론 성룡 영화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80년대는 본격적인 액션 영화 전성시대로, 우리가 지금도 잘 아는 대표 액션 배우들인 아놀드 슈왈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탤론, 척 노리스와 브루스 윌리스 등이 등장한 시기입니다. 흔히 액션 영화라 하면 떠오르는 탄피! 파괴! 폭발! 등은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죠. 대표적인 영화로 <매드 맥스>, <터미네이터>와 <람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다이하드> 등 셀 수 없이 많은 액션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액션 영화는 미국을 넘어 전세로 그 영향력을 넓혀 나갑니다.
그리고 1990년대. 드디어 냉전이 끝났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미국. 그리고 승자독식의 원리처럼,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때 미국의 경제는 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게 되는데요, 넘쳐나는 자본과 함께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분위기는 영화계에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이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는 항상 성조기가 휘날리기 시작합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미군들이 총출동하여 폭격을 쏟아붓습니다. 악당은 미국을 위협하는 아시아-아랍 테러리스트로 고정입니다.
1990년대는 또 다른 빅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밀레니엄(2000년)입니다. 그래서 새 시대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반영하는 영화들도 많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종말론 적인 분위기도 팽배했습니다.
이런 트렌드가 당연히 영화들에도 반영되었고, 이때 각광을 받은 장르가 바로 재난영화입니다. 제작사들은 소행성 충돌, 화산 폭발, 대지진에 외계인 침공 등 온갖 소재를 가지고 재난 영화를 찍었고 또 히트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미국이 해결하는 스토리) 많은 분들에게도 <아마겟돈>, <인디펜던스 데이> 등의 영화들이 아직도 기억에 선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모두가 외계에서 오는 재앙을 걱정할 때, 가장 큰 혁명은 내부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컴퓨터가 발명된 건 한참 전이지만, 워낙 초보적이고 고가의 기술이라 군사-연구적 목적에 한정되어서 사용되었죠. 영화계에선 이미 80년대 초부터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영화들이 등장했으나, 기술적 한계가 뚜렷해 몰입감을 깨다 보니 흥행에서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에 컴퓨터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며 대중들에게도 친숙해졌고, 실사영화에 사용하기에도 어색하지 않은 수준이 되자, 컴퓨터로 만든 영상(CGI)은 영화 산업 전반을 뒤흔들게 됩니다. 더 이상 모형이나 그림으로 눈속임을 하지 않고 원하는 내용이 어떤 것이던지 그래픽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된 엄청난 규모의 재난 영화들도 모두 CGI의 발전으로 만들 수 있었던 영화들입니다.
거기에 더해 이전에는 보여줄 수 없었던 구도와 카메라 워킹을 접목시키면서 블록버스터와 액션 영화들의 흐름이 완전히 바뀝니다. 특히 90년대는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로 SF 소재가 주목받던 시점. SF와 CGI의 결합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한 소재들의 영화화를 실현합니다. 그 정점이 바로 2000년을 1년 앞두고 등장한 <매트릭스>!
비교적 저예산 영화였지만 <매트릭스>가 끼친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이제 모두가 상상력을 구현하는 것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깜짝 놀란 제작사들은 그동안 묻혀있던 수많은 판타지 소재들을 싸그리 긁어 모아 영화화를 시키는 데에 혈안이 됩니다. 이런 영화들은 막대한 자본이 드는 CGI 특성상 오직 할리우드만 만들 수 있는 영화들이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전 세계 관객들을 매료시켜 더 많은 돈을 할리우드로 몰고 옵니다.
격동의 90년대, 20세기가 끝나고 마침내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막상 2000년대가 되어보니 그 전이랑 크게 다를 게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도 없었고, 로봇들의 반란도 없었으며 소행성은 코빼기도 안보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실은 더 비참합니다. 당장 2001년에 일어난 9.11 테러는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버립니다. 영화 속 위풍당당 미군의 위용은 어디 가고 보이지도 않는 테러리스트들과 사막에서 끝없는 전쟁의 늪에 빠져버립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 더해 액션 영화계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집니다. 화려한 특수효과와 거대한 스케일로는 CGI 기술에 힘입은 SF/판타지 영화와 더 이상 경쟁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차별화될 점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었죠.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영화가 액션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놓습니다.
<본 시리즈>는 이전까지의 액션 영화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일단 당장 주인공부터가 지극히 평범해 보입니다. 조각 미남 스파이도 아니고 베테랑 형사도 아니며 특공대원도 아닙니다. 기억을 잃은 암살 요원이라는 설정이지만, 입고 다니는 옷은 후드티고 타는 자동차는 훔쳐 탄 택시이며, 권총도 아니고 굴러다니는 책으로 적을 두들겨 팹니다. 바람둥이도 아니고 한 여자만 바라보며 술 담배는 건들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싸우는 적도 테러리스트나 북한군이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던 미국 CIA입니다. 20세기의 미국 액션 영화들과는 정말 다른 결을 가지고 있죠?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와 성찰이 이루어지던 시대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액션 스타일도 굉장히 달랐는데, 보시다시피 <본 시리즈>의 특징은 극단적으로 짧은 편집과 핸드헬드 촬영 방식입니다. 어찌 보면 구토유발 영화가 될 수 있지만, 절묘한 촬영 동선과 필요한 정보를 가감 없이 0.1초 단위로 전달하는 편집으로 마치 내가 초인적인 주인공의 운동신경을 직접 느끼며 싸우는 듯한 몰입감을 가져다줄 수 있었습니다. CGI 하나 없이 맨몸으로 들이받는 스타일의 액션은 판타지 장르에서 느낄 수 없는 액션 영화만의 원초적인 쾌감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치 이소룡이 70년대에 주었던 충격과 비슷합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본 시리즈>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2000년대 이후 액션 영화들은 이를 모방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2008년 작 <테이큰> 이 대표적인 예시이고, 심지어 액션의 할애비 격인 <007> 시리즈마저 깜짝 놀라 이런 스타일을 도입한 새로운 제임스 본드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카지노 로열>로, 이전 007과는 달리 순정파에 몸이 앞서는 동물적인 본드였죠. 이 또한 호평을 받으며 대성공을 거둡니다.
그렇게 <본 시리즈>의 스타일이 지배한 2000년대가 지나고 2010년대가 되자, 역시나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기 시작합니다. 영화들이 죄다 보이는 것도 없이 카메라를 흔들어 대고 편집을 해대니, 멀미 나서 죽겠다!(아까 말했듯 자칫 잘못하면 구토유발자)라는 불만이었죠.
편집과 촬영으로 만든 액션이 아닌, 정말 날 것의 액션에 목마른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에 화답하는 영화들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레이드>와 <존 윅> 이 대표적인데요,
보시다시피 짧은 편집이 아닌 롱 테이크, 바짝 붙인 클로즈업과 핸드헬드가 아닌 몸동작 전체가 보이게 찍는 구도 등 <본 시리즈>가 만든 액션 트렌드와는 정반대라 할 정도로 비교되는 영화들입니다. 이 중에서도 <존 윅>은 키아누 리브스 특유의 시크한 매력과 무협지 같은 세계관이 결합되어 컬트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현실감 100%의 본이 인기를 끌었던 것과 정말 다르죠.
혹시 눈치채셨나요? 이런 특징 모두 80년대 성룡의 영화들과 정말 비슷합니다. 육체적인 스턴트에 의존한다는 점, 그런 스턴트를 한눈에 담을 수 있게 찍는 촬영과 편집 등 많은 부분이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웃기냐 웃기지 않냐 정도일까요?
이런 기법은 스턴트가 조금이라도 어설프면 퀄리티가 급격히 떨어져서 몰입감을 해치기가 쉬워서 편집과 효과로 눈속임을 하는 방법보다 훨씬 촬영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오랫동안 트렌드로 남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 이렇게 영화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을 둘러보며 역사와 트렌드가 액션 영화, 또 영화 전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마치 역사책을 보는 거나 다름이 없죠? 또한 이런 유행이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반복되며 순환한다는 것도 놀라운 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앞으로는 어떤 액션 영화가 유행할까요? 사실 어떤 역사적 사건이 세계정세를 흔들어 놓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에 섣불리 예측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심스럽게 예상하건대 CGI가 그랬듯이 신기술의 등장이 영화 산업을 통째로 흔드는 때가 곧 올 것으로 보입니다. 스트리밍 기술의 완성으로 넷플릭스 등이 시장을 휩쓰는 것도 해당됩니다. 여기에 VR이나 AR 같은 기술이 발전하면 영화는 더 이상 평면의 스크린을 앉아서 감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겠지요. 과연 액션 영화는 어디로 갈지, 또 어떤 것을 반복하게 될지 기대하면서 오늘도 팝콘을 씹어봅니다.
- 더워터멜론 KH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