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진-미나리김밥, 애호박국수, 오리담요]
#장면 1. 미나리김밥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김밥을 먹고 싶으니 만들어달라는 남편의 지시(?)에 나는 투덜거리며 김밥재료를 준비하여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는 약속이 생겼으니 밖에 나가서 먹겠다고 하지 않은가. 너무 화가 나서 다툰 후 나는 한동안 김밥을 만들지 않았다.
김밥을 사 먹고 말지, 그 힘든 것을 뭐 하러 만드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게 화낼 일이었나 싶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잊어버렸지만, 아마도 말을 얄밉게 해서 내 속을 긁어 놓았으리라...
그러다가 얼마 전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싸워서 뭐 하나. 이겨서 뭐 하나. 덧없는 인생.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미나리김밥을 싸주자.
미나리, 어묵, 이것저것 김밥재료를 준비해 오랜만에 미나리김밥을 싸주며 남편에게 말했다.
“미나리김밥 맛있게 먹고, 지난 서운한 일은 전부 잊어버리자.”
나름대로 내 방식으로 미나리김밥에 관하여 화해를 요청한 것이다.
이렇게 미나리김밥:전(戰)은 몇 년간의 휴전(休戰)이 끝나고 종전(終戰)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주말마다 김밥을 자주 만들어 주게 된다...
하아...
사 먹는 김밥도 좋아하지만, 사실 집에서 만드는 김밥이 다르긴 다르다.
식구들 입맛에 맞추어 미나리와 어묵을 넣은 김밥, 피클처럼 절인 오이와 햄을 넣은 김밥.
두 가지 종류로 만든다.
요리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만들어주면 고맙게도 가족들이 맛있게 먹어 준다.
(우리 집 가족들이 잘 먹어주면 나는 그저 고맙기만 하다. 먹는다는 것은 먹겠다는 선택과 결정을 한 것이고 뱃속에 내가 만든 음식이 들어가니 나와 나의 음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먹는다’보다 ‘먹어 준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단무지를 싫어하는 둘째 때문에 우리 집 김밥에는 단무지 대신 오이를 넣는다.
오이는 채 썰어서 설탕, 소금, 식초 1:1:1로 절여두고 물기 꼭 짜서 김밥재료로 넣는다.
내가 싼 김밥을 먹어본 사람들은 그냥 심심한 맛으로 맛있다고 한다.
내가 싱거운 사람이라 그런가.
#장면 2. 애호박국수
남편과 둘째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었다.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집안의 냉랭한 공기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나는 새우...)
이 다툼의 여파는 둘째의 학원 라이딩을 혼자 짊어져야 하는 나의 고달픔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심경에 변화가 있었는지 먼저 가볍게 둘째에게 인사를 건넸고, 둘째도 인사를 했다.
바로 그 다음날 둘째가 아빠에게 국수를 먹고 싶으니 만들어달라고 하였다(부탁이 아닌 주문이라고 해두자).
남편은 평소에도 면 요리를 아이들에게 자주 해주는 편인데 아빠와의 냉전기간 둘째는 국수가 먹고 싶었어도 차마 말하지 못했을... 아니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해주겠다고 해도 엄마가 해주는 것은 맛이 없다며 단칼에 거절하였다.
모처럼 둘째에게 국수 주문을 받은 바보아빠는 평소보다 더 정성 들여 육수를 내고 애호박과 당근으로 고명을 준비하여 국수를 만들어내었다.
남편은 말없이 먹고 있던 둘째에게 슬쩍 다가가더니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였고 둘째 역시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안방에 누워있던 나는 살짝 열려있는 문틈으로 부엌에 있는 두 사람의 광경을 훔쳐보며 남몰래 흐뭇했다.
# 연출자 의도와 각본대로, 주연은 때로는 모르는 척 넘어가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나도 잘 알고 있다.
말로 사과하는 것이 서투르고 어색하고 불편할 때 음식이나 물건을 은근슬쩍 내민다. 그러면 연출자의 의도대로 분위기가 부드럽고 말랑해지며 화해의 시도는 절반의 성공에 가까워진다.
특히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맛있게 먹고 기분이 스르르 좋아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갈등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음식은 혀끝의 즐거움만 주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화해를 위한 조연으로 이렇게 멋지게 등장하여 자기 역할을 해낸다. 그러니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배부름과 더불어 마음과 웃음을 함께 주고받는 일이다.
# 장면 3 [에필로그] 오리담요
“이거, 당신이 나 덮어줬어?”
“그게 뭔데?”
남편이 나에게 노란색 오리모양 담요를 내밀며 물었다.
남편은 평소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다가 곧잘 잠이 든다.
그런데, 나는 남편보다 먼저 잠이 드는 편이라 남편이 거실에서 잠이 들었는지, 이불을 덮고 자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 그거 우리 둘째 담요인데. 둘째가 덮어 주었나 보다. 간밤에 많이 추웠는데.”
“진짜?”
남편의 발걸음은 행복한 리듬을 타며 둘째 방으로 향한다.
“둘째야, 어젯밤에 네가 아빠한테 담요 덮어줬니?”
“응.”
“그래, 고맙다. 우리 둘째밖에 없네.”
아침부터 훈훈한 장면이 한 번 더 연출된다.
이번 장면 조연은 오리담요라고 하자. 꽥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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