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들리지 않는 은지들에게

위로는 고난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들린다.

by 김작가

위로는 고난의 크기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들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 췌장에 혹이 생겨 6개월 넘게 주사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보통 주변의 위로가 “다행이다”였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실비로 처리되는 주사 치료, 착한 혹, 초기 발견 등을 이유로 나를 위로하려 했다. 나는 그 위로가 들리지 않았다. 열심히 7개월 넘게 다이어트를 한 나에게 주어진 결과물이 고작 췌장에 혹이라니 신장에 퍼진 돌이라니 속상했다. 그렇게 나는 혹과 돌을 내 삶의 결과물로 여기며 스스로를 위축시켰다. 나에게 적어도 “다행”이라는 평가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를 그렇게 다그친 탓에 위경련과 두통으로 온몸이 고생하고 있었다. 그 때 친한 동생의 전화로 나는 위로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행이야, 그렇게 몸이 좋은 말로 할 때 들어


그 동생은 30대 초반에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고 회복 후 둘째 출산으로 육아 휴직 중인 상태였다. 감히 나의 혹을 그녀의 암과 비교한다면,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수준일 것이다. 그녀가 겪은 경험과 고난, 그리고 성숙에서 우러나온 '다행'이라는 위로는 내게 진짜 위로가 되었다. 다른 이들의 위로가 하찮고 가식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녀의 고난과 나의 고난을 비교해서 내가 더 가벼워서 다행이라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고난의 강도가 아니라
고난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다행이기에
위로가 되었다

그런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며 새로운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그녀의 삶의 태도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다.

네 일 아니라서 참 쉽게 이야기하네~ 라고, 삐딱하게 바라보는 나에게 고개 똑바로 들고 보라고 다행이라고 손으로 내 얼굴을 제대로 앞을 보도록 잡아주는 위로였다. 그래서 말인데 그녀가 한 위로를 생생한 사투리 라이브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은지야~으이고~몸이 좋은 말로 할 때 들어라. 혹이라잖아.”

그런데 동생아. 너 나보다 4살 어리거든 언니라고 언제 불러줄 테야.. 까불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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