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의 닻 보다 존재의 돛을
1년 전, 둘째가 발달이 느리다는 진단을 받은 다음 날 나는 복직했다.
그날 퇴근길 차 안에서 전화 너머 친정엄마와 여동생에게 처음 뱉은 말은,
“설마, 내 탓은 아니겠지...”였다. 그 말에 여자 3명은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다.
그 말은 내 마음 깊숙이 죄책감의 닻을 내려버렸다. 그 후로 내 마음의 배는 멈춰 섰다.
그 사이, 나를 괴롭히던 염증은 걷지 못할 정도의 통증이 되었고 결국 2주 병가를 선물처럼 받았다.
1년간의 죄책감과 1개월의 통증은 시너지 효과가 되어 걷지 못할 만큼 큰 고통이 되었다. 하필이면 병가 중, 둘째는 열감기에 걸렸다. 열 오른 아이와 이 상황이 열받은 나는 그 새벽, 오랜 시간 함께 깨어 있었다. 나는 지쳐 우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너도 고생했지. 이유도 모르고 병원을 왔다 갔다 했잖아. 아플 때도 됐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깨달았다. 그 위로는 내게도 필요했다. 그리고 조용히 나에게 다독였다.
“그래, 나도 고생했어. 나도 아플 때도 됐지.”
사실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나를 다그쳤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건, 다그침이 아니라 위로였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벤트’라 불리는 크고 작은 일들이 생긴다. 그때마다 죄책감에 끌려다닌다면, 이 싸움은 백전백패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제는 닻이 아니라 돛을 바라보자고.
“아프지 마”가 아니라,
“그래, 아플 때 됐지. 좀 쉬자.”
이렇게 스스로의 편이 되어주는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위로하려 한다.
나는 그래도 된다. 왜냐하면 나는 존재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발달과 상관없이 존재만으로 사랑받듯, 나 역시 자식 농사의 성패와 상관없이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 나도 그런 존재다. 그러니, 나도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
이 명제를 계속 되새긴다면, 위로의 돛은 점점 넓고, 튼튼해질 것이다.
내가 내린 죄책감 닻보다 존재의 소중함의 돛이 진리라면 이 배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아가서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