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의 기억, 지금의 감사
주일 오후 5시. 우리 집은 말 그대로 전쟁터, 아니 야전 병원 같았다.
첫째는 다리가 아프다며 울고불고, 콧물까지 훌쩍거렸다.
“엄마가 주물러줘야 낫는다니까!”
아빠가 옆에 떡하니 앉아 있어도 소용없었다.
둘째도 질세라 소리를 높였다.
“아파, 아파! 눈도, 코도, 입도 다 아파!”
엄마가 안아줘야 한다고 했다.
누가 더 아픈지 겨루는 오디션이라도 열리는 듯했다.
결과는 무승부.
둘 다 울고불고하는 통에, 나도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다.
“이제부터 우는 사람은 이 방에서 나간다!”
엄포를 놓자 잠시 고요가 찾아왔다.
나는 아이들 사이에 누워, 십자가에 달린 사람처럼 양팔을 벌렸다.
오른팔은 첫째 다리를 주무르고, 왼팔은 둘째의 베개가 되었다.
의약품 조달은 남편 몫이었다.
시간이 흘러 저녁 7시.
우리 집은 겨우 평화를 되찾았지만,
우리 부부는 아직 저녁밥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남편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여보. 옆에서 안아줄 수 있는 게 어디야.”
그 말 한마디에 문득, 2020년 3월 27일이 떠올랐다.
대구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하던 그날, 나는 첫 아이를 1500g 미숙아로 낳았다.
그리고 단 한 번도 품에 안아보지 못한 채, 생이별을 했다.
병원은 완전 격리 상태였다.
면회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산모였지만, 내 곁에 아이는 없었다.
하루에 한 번, 간호사와 5분간 통화하는 게 전부였다.
“광선치료 중이에요.”, “오늘은 분유 45cc 먹었어요.”
“황달이 있어요.”. “잠을 설쳤어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손길은 허락되지 않았다.
안아줄 수 없고, 달래줄 수 없고, 바라볼 수도 없었다.
나는 엄마였지만, 엄마일 수 없었다.
그 상실감은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잃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함이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무너졌다.
그 시기를 지나 지금, 아이 둘이 동시에 울고 떼를 써도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만은 괜찮다.
물론 내가 늘 감사로 충만한 엄마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여전히 남편과 다투고, 아이들에게 불을 내뿜는 용이 되어 온 집안을 불바다로 만들 때도 많다.
이 글은 그런 나를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지금의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되새기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 이 야전 병원의 삶이, 그때 ‘상실했던’ 시간에 비하면 분명 감사할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