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Writing (2): Why - 작가는 왜 쓰는가?
브런치 작가라는 ‘신분’을 얻게 된 후 4개월이 되어가고 있다. 사회인의 용어를 쓰자면 1/4분기가 지난 거다. 브런치작가라는 명칭을 줄여서 감히 스스로를 ‘작가’라고 불러보겠다. (양해부탁드립니다.)
작가가 된 후 가장 먼저 바뀐 것 시간활용이다. ‘작가’의 삶은 심심할 틈이 없다. 육아 중인 직장인이라는 점도 물리적으로 작용하고 있겠지만, 흘러가는 시간들과 생각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예전엔 그저 작은 노트에 적어 두기만 하던 것들이 손가락을 거쳐 키보드를 거쳐 블루투스를 거쳐 디스플레이에 구현되고 메모리에 저장된다.
지난 글에서는 ‘어떻게 써야하는 가’라는 HOW에 대해 알아봤다.
https://brunch.co.kr/@thewholeiceberg/112
그런데 생각해보니 HOW보다 중요한 게 WHY였다.
작가들은 왜 글을 쓰는 걸까?
왜 의사, 회사원, 교사, ‘가정공동운영자’ 이자 ‘가내교육부장관’ (사회에선 ‘주부’라 부른다) 어엿한 커리어가 있고, 돌보야 하는 가정구성원들이 있어 잠이 필요하고 ’쉼‘이 필요한 분들이 작가가 되어 글을 쓰는걸까?
그리고 나는 왜 잠을 줄여가며 즐거움을 주는 콘텐츠시청의 시간을 포기하고 글을 쓰려고 하는 걸까?
이 글은 나에게 기억 속 깊이 묻어두었던 꿈(들)에 새싹을 틔워준 작가님들에게 현실적으로 유용한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 쓰여지고 있다. 그러니 유명작가가 뭐라 했는지 먼저 담으려 한다.
알랭 드 보통이 글쓰기를 주제로 한 강연을 찾아보다가* 2015년 홍콩대학교**에서 세 명의 다른 장르의 작가들과 함께 진행한 포럼 영상을 발견했다.
이 오픈 포럼(Open Public Forum)의 부제는 무려 How and What and Why do Writers Write? 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은행가인 아버지를 두었고, 이 포럼에 함께한 패널 둘도 유복한 집안의 자녀들이다. 이 구성원을 모을 수 있었던 홍콩인 사업가 Sir David Tang이 작가들을 소개하는 걸 들어보니 어렸을 때부터 이 작가들을 봐왔던 재계의 유명인사인가 보다. 어렸을 때부터 알랭 드 보통을 봐왔다니…;; 가장 왼편의 여성은 ‘철의 여인‘ 태처 수상의 딸이고 가운데 남성은 은행업을 하다가 열망을 쫓아 작가가 되었다. 비싼 사립학교를 다니던 시절 공산주의자를 자청하던 버릇없는 학생으로 태처 수상과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고 하니 이 분도 ”높은“ 집안 출신 자제분인가보다.
* (지난 글쓰기에 관한 글을 쓸 때, 좋아하는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은 글쓰기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알아보던 중 확보된 자료이다. 시청을 미뤄두다가 뒤늦게 보고 땅을, 아니, 데스크를 쳤다는 후문이다. 이 행사를 주최한 David Tang 경(Sir)의 도입부 인사와 소개를 듣는 게 괴로워 버티지 못하고 나중에 듣게 되었다.)
** 브런치(출간)작가님들 중 가장 먼저 알게 된 이예은 작가님의 모교이기도 하다.
https://brunch.co.kr/@leeyeeun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하, 알랭 드 보통)
"이 포럼의 시작을 왜 우리가 글을 쓰는 지에 대한 회상/성찰로 해보려 합니다.
글쓰기란 이 이상한 일에 대해서요.
So what I’d like to start with, (생략), reflections on why we write. What’s the strange business of writing.
(그리고 오프닝부터 청중을 빵 터뜨리는 알랭 드 보통)
우선 제가 말씀드려야 할 것은…
관객 중에 혹시 부모님이 있으시다면 작가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아이를 길러내시길 바랍니다. 그건 아이가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없는 것은 ‘좋은 양육’의 징조(sign of good parenting) 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는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들에게 없어야할 ‘어두운’ 곳에서 오기 때문이죠.
-알랭 드 보통-
(농담半)
제 생각에 글쓰기의 원천/근원은 (마음 속 이야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느낌에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관심 없을거야 / 충격 받을꺼야'
그래서 전하기 어려운 그 소중한 것들을 종이 위에 쏟아내는 겁니다.
저에게 글쓰기는 사춘기의 일기장에서 시작됩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친구들과도 나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생각들.... "
First of all, I should say... if there are any parents in the audience, you will not bring up children with any desire to become a writer. It's a sign of good parenting that your child has no aspirations to write. [crowd laughs] because I think the urge to write comes from dark place which a loving parents should spare a child.
*부족한 번역에서 나올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줄이고자 원문 포함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때 숙제로 주어지는 일기. 나의 일상과 생각을 적은 글에 선생님의 생각이 빨간글씨에 담겨져 돌아오는 게 좋았다. 부모님에게 있었던 불만, 친구들과 있었던 아쉬운 일들.
거기엔 가끔은 빨간색 스마일 표시만 있을 때도 있었지만, 종종 어른의 조언이 적혀 돌아올 때도 있었다.
‘친구들에게 ~(이렇게)~말해 보는 건 어떨까?’
초등학교 고학년 때, 어머니께서 일기를 훔쳐본 것을 알고 어머니에 대한 ‘신뢰’를 잃었던 적도 있다. <데스노트>에서 나오는 치밀한 장치는 내가 이미 1994년에 고안해 책상서랍에 도입되어 있던 시스템이다.
(작은 종이를 끼워 놓는다거나, 서랍 바닥에 두꺼운 종이를 깔고 그 아래 일기장을 둔다거나)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은 작가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작가의 말을 인용한다.
외래어 표기법은 랠프로 적는 것 같은데, 정말 영국, 호주 발음은 어쩔려고 미국식 발음을 기준으로 하는 건지 의문이다.
”우리는 (작가라는) 천재들의 생각/정신 속에서 우리가 방치한 생각들을 발견한다“
In the mind of geniuses, we find our own neglected thought
- Ralph Waldo Emerson-
”우리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책들은 그 책이 복잡하거나 ardeous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으로 가득차있기 때문인 거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인데 우리들은 보통 무시하고 방치하고 별 관심을 주지 않지만, 여기서(이 책들 안에서)는 작가가 그것들을 붙잡는 것에 성공한 것이죠. 우리의 내면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세상에 나가며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 디너파티에서 친구들 사이에 명함 위에 있는 우리들은 종종 잔인할 정도로 요약된 우리의 참모습이죠."
정말이다.
류귀복 작가님의 글을 읽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알랭 드 보통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도 느꼈던 부분이다.
내가 생각치도 못했던 부분에 감탄하는 것보다 내가 생각했던 부분들이 내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던/못했던 정제된 표현으로 나온 걸 마주할 때가 많았다.
(물론 책의 장르에 따라 내가 해본 적 없는 상상과 지식에서 감탄할 때도 적지 않다.)
알랭 드 보통은 이어간다.
"우리가 쓸 때, 또 그리고 읽을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더 충실한 버전의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것처럼:
이 작가가 "너무나 개인적인 것 같지만 파악할 수 없었고, 명확히 주장할 수 없었던 나의 생각/아이디어, 개념, 느낌에 손을 얹은 것 같아. 마치 작가가 우리가 스스로를 아는 것보다 더 잘아는 것처럼"
작가들은 단순히 자기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에 보다 충실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었던 겁니다.
and they've been able to do this, and they were able to do this , by simplying being more loyal to what is actually going on inside them,
- 알랭 드 보통-
인간의 본성은 꽤 범세계적/비슷합니다.
누군가를 잘 아는 최선의 방법은, 자기 자신에 대해 배우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많은 질문들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저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그건 아마도 타인의 내면에 있는 것과 비슷할 겁니다."
이 부분은 부분적으로(만) 공감되었다.
인간이기 때문에 공통적이고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하고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 관찰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삼는 게 우선이라는 이야기. 타인을 향한 관찰은 제한적일수 밖에 없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것들은 질문을 통해 얻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스스로를 인터뷰 대상으로 삼을 때, 다른 누군가와의 인터뷰 때보다 제약 없이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있고, 묻지 말아야하는 질문도 없어진다. 자기 자신에게 그만한 관심이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그건 작가에게 필요한 적당한 자기애와 적당한 자기망상에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가인지 기억나지 않아 잠시 표기를 하지 못하지만 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난 정말 잘났어. 난 위대한 작품을 쓸 거야" 이렇게 믿어야 한다고.
유부남인 알랭 드 보통은 다음 요점으로 파격적인 대사를 던진다.
시드니오페라 하우스에서 한 강연으로 미루어보아, 드 보통 작가님은 개그욕심이 있다
“제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여자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전 미국 작가 필립 로스(Philip Roth)의 ’사랑스러운‘ 문장을 늘 기억합니다.(그가 50대 후반의 나이로, 이미 훌륭한 작가로 인정 받은 후 였어요. 그 땐 이미 퓰리처상을 받았을 때입니다.)
기자회견 중에 질문을 받습니다.
'작가님은 왜 글을 쓰시나요?'
필립 로스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여자 만나기 위해서요.
(to meet girls)'
이건 사랑스러운 욕망의 해소였습니다.
그는 편협적인 의미에서 그가 작가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침대에 갈 수 있다'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죠.
누군가 그 테마를 확장하자면 그가 진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책을 쓴다는 건 소통의 행위이고
존재하는 모든 형식 중
가장 깊은 형식의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알랭 드 보통-
다른 말로 하자면 이건 우정을 쌓는 겁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당신의 책을 줄 때, 또 그들이 그걸 제대로 읽는다면,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은 영혼의 내용물을 다른 사람과 교환하는 겁니다.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절차와 꽤 비슷한 거죠.
제 생각엔 작가 필립 로스의 코멘트에는 굉장히 감동적이고 고상하고 위대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책을 쓴다는 것은 가장 깊은 방식의 소통이다. ” 정말 멋진 말이었습니다.
물론 조건절이 붙죠. “독자가 제대로 읽는다면...!"
(물론 작가 필립 로스가 정말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이건 이렇게 미화시킨 게 알랭 드 보통의 작가로서의 역량일 수 있겠습니다만...)
브런치에서 글을 쓰면서 제가 느낀 것이기도 합니다.
만나본 적이 없는 누군가의 글에 공감하고
(아내의 말엔 공감하지 못한다고 불평을 듣는 주제에 말이죠)
글을 통해 드러낸 제 사소한 감정과 과거사, 그리고 흘러가다 붙잡힌 생각들을 누군가 읽어주고, 그걸 통해 짧거나 긴 대화(댓글)를 하게 되고.
또 다른 작가님들의 글 속에서 그 분들의 삶과 마음을 읽게 되고…
그게 브런치라는 공간이 주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이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지금 규모의 구독자수를 가진 작가들이 누릴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구독자가 많아질수록 그런 가까운 소통과 관심의 표현은 점점 어려워질 것 같으니깐요.
그래서 전 지금이 좋습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You can’t have too many friends
처음엔 이게 뭔말인가 싶었는데, 진정한 의미의 우정이란 걸 생각해보고, 우정에 대해 이야기한 ’현자‘들의 글과 강연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무형의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은 24시간 속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한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 그 사람에게 할애하는 시간이 물리적 제약을 받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고 각자의 일과 시간, 가족이 생기며 연락이 소홀해지는 친구들과 모두 우정이 옅어졌냐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종종 빈도와 농도는 같이 움직입니다. 1대1로 만나서 나눌 수 있는 깊은 이야기와 1대100으로 만나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겠죠.
파리외곽 한국여자 작가님(https://brunch.co.kr/@815)이 계신 곳이 덥다고 하면 (무슨 어머니 아들 정도의 나이차이도 아닐텐데)
‘아이고… 우리 작가님 알리익스프레스로 선풍기 하나 보내드릴까?’
(어머니에게 보일러 놔드려야겠어요~' 광고 패러디)
생각하며 ‘주소를 몰라서 아쉽네…’ 생각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가능한 게 아닐까 싶어요.
류귀복 작가님(https://brunch.co.kr/@gwibok)이 말씀하시는 ‘첫 댓글‘의 중요성(?)이 그걸까요. 물론 쓰시는 글이 절 계속 읽게 만드는 것도 있지만 확실히 첫 댓글이 남긴 온도는 깊이 남았어요.
(브런치 알고리즘은 아직 충분히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브런치 의문의 1승인걸로.)
참신한 기획으로 미술과 의학을 하나의 글에 접목시키는 멋진 기획의 작가이자 늘 과찬의 댓글로 부족한 창작에 힘을 더해주시는 sweet little kitty 작가님(https://brunch.co.kr/@kitty)이나 세계 곳곳에 출몰하시며 예술에 대한 글을 나눠주시는 꽃보다 예쁜 작가님(https://brunch.co.kr/@0afe4f4ba5ef4a2). 사유의 패턴이나 중국어라는 공통점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이 보이는 바람꽃 작가님(https://brunch.co.kr/@baram-flowers), 나와 다른 사고방식과 표현방식, 다른 전문지식으로 새로운 감회를 선사해주시는 김소이 작가님(https://brunch.co.kr/@echoes), 아이를 키우시며 AI도 훈련시키시는 지성과 감성을 겸비하신 최재운 작가님(https://brunch.co.kr/@plutoun) 등 감사한 분들이 많네요. 마침 ‘왜 쓰는 가’에 대해 고민 중이시신 것 같은 민트별펭귄 작가님 (https://brunch.co.kr/@mindalpenguin) (복귀 축하드립니다)
*브런치 시절부터 알고 존경해온 작가님도 뒤늦게 브런치에서 발견했어요. 생물학자이자 다독가인 김영웅 작가님(https://brunch.co.kr/@youngwoongkim77) 도 마침 글쓰기에 대해 쓰신 브런치북이 있으셔서 공유해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readingnwriting
다들 돌보고 있는 가정에 바빠 실제 지인이었다면 더 만나기 어려었을 수도 있을텐데, 글과 글을 통해 만나 카톡에 있는 지인들보다 더 자주 ’목소리‘를 듣게되고. 궁금하게 되고.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현실과 온라인의 균형(혹은 경계)가 무너지는 기준은 카톡으로 하는 대화 보다 댓글에 쓰는 시간이 더 많아질 때- 로 잡고 있습니다.)
아무튼 연재브런치북도 (출간서적의 완성도와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렇습니다.
영혼을 드러내고, 읽어주는 분들에게 닿고 만져지는 것.
그런 깊이 있는 소통.
알랭 드 보통은 이어갑니다.
전 또 글쓰기라는 행위가 깊은 치유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인류를 스트레스 받을 때 어떤 걸 하는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벌고, 어떤 사람들은 조깅을 가죠.
그리고 소수의 그룹 - 그들을 intellectuals 지식인이라고 불러보죠 - 은 혼자 앉아, 태블릿이나 종이를 들고, 글을 씁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가 쓴 걸 보면, 질서와 패턴이 보이죠. 그러면 내면의 혼란스러움이 어떻게든 외관적 질서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건 ‘겁나’ relaxing 합니다.(=편안해지는 기분을 주기도 합니다. )
이게 글쓰기를 치유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유일까 싶습니다.
우리 안에 흘러다니는(?) 생각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목소리 처럼 스쳐지나 갑니다.
그런 생각들이 벌레라면 채집망이 글쓰기인 것 같습니다.
날아다니는 그 ‘생각들‘을 잡아 종이나 모니터나 태블릿의 디스플레이에 나열합니다.
그럼 과거의 상처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준비가 된 겁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 ”전지적 작가 시점“을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가.
B교수의 심리학 수업에서도 두려움이나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유사하게 이야기 합니다. (아마 인지행동치료의 관점인 것 같습니다.) 기억에 기대어 적는 거라 정확한 인용은 아닐 수 있겠지만 이런 말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향태가 없기에 제일 무서운데, 글로 담아내면 보이는 것으로 바뀌기 때문에 조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생각으로만 존재할 때 무서웠던 것들이 글이 되어 읽게 되면 그렇게 무섭지 않은 거였다는 걸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제가 경계하는 ’기록을 통한 ’확대해석‘이나 ’아픔에 대한 과민성 반응‘으로 이어지면 그 반대의 효과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사용하기 나름일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면 편지를 썼고, 그 편지를 보내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죠.
어떤 걸 보내고 어떤 걸 버릴지 작가의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한만큼, 전 모든 글쓰기가 치유로 이어지진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겪은 모든 불쾌하고 슬픈 일들을 다 기록하고 다시 읽고 곱씹어보며 사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과는 꽤 다른 캐릭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기록하지 않았는데도 남아있는 것들도 이렇게 있는데, 기록하며 복기한다면 용서나 이해와 멀어지지 않았을까…?
물론 사람마다 극복하는 방법과 능력이 달라지기도 하니, 일반화 시킬 수는 없겠죠.
마지막으로 알랭드보통은 현지독자, 즉 홍콩의 독자들에게 ‘현지화’된 것 같은 이유를 듭니다.
“여러분들은 홍콩이라는 굉장히 실용적인 도시에서 살고 계시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용적인 것’ 돈을 버는 일을 할 겁니다.
제 생각에는 작가들 역시 극히 실용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들 역시 부동산개발업자처럼 실용적인 일을 하죠. 작가들은 외부세계를 깔끔하게 하는 하는 게 아니라, 내면세계를 대상으로 하죠. 내면세계의 암흑과 혼돈 가운데 이름을 붙이고, 지도를 만들고, 고속도로와 차선을 만드는 거죠.
(앞서 말한 것들이)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
지난 글에서 알랭 드 보통이 생각하는 어떻게 써야하는가 에 대한 부분이 드러났던 부분입니다.
독자를 고려해서 쓰는 것. 이 강연에서는 홍콩이라는 지역의 (편견에 맞는) 독자들을 고려해 부동산개발업과 글쓰기를 비유했다.
암흑과 혼돈의 내면세계를 재개발대상지역으로 보고 부동산개발하듯 (혹은 게임을 좋아하셨던 분이라면 알 것 같은 ‘심시티’ 하듯).. 정리하고, 보기 좋게,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해 글을 쓴다는 거다.
부동산개발을 통해 초등학교 시절 살았던 동네가 다 ‘브랜드 아파트’가 되고, ‘아랫 동네’ 사는 사람들이 산을 볼 수 없게 만든 것 같다고 느끼는터라 썩 다가온 비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혼돈을 정리한다는 측면에선 공감이 된다.
글은 그런 '정리의 힘'이 있다. 그래서 글을 많이 써본 사람들은 말도 달라진다.
논리와 전개가 다르다. (물론 '경연자'로서의 스킬은 연기 쪽에 가까운 연습도 필요하다)
1시간 50분 짜리 오픈 포럼 중, 알랭 드 보통의 발화를 가져와 이 글의 토대로 삼았다.
가장 맘에 들었던 문구만 뽑자니 문맥도 중요한 것 같고, 버리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내겐 별로였던 문장이 다른 작가님들에겐 의외의 감회를 줄 수 있다는 생각도 드니 더 어려워진 ’편집'.
그런데 한 마디 한 마디 다 버리기 싫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이 작가를 좋아하기 때문일 거다.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소중하다.
그래서 다 적어두고 싶은 게 아닐까.
어차피 유명 작가의 발언의 비율이 너무 높기 때문에 이 글은 출간물로서는 활용할 수 없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어느 한 마디가 창작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 대는 작가지망생들에게 힘이 될까 싶어 힘을 많이 쏟지 못한 부족한 번역이지만 이렇게 올리기로 한다.
P.S= 이 강연에서 소위 Writer’s Block 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건 시간 관계*상 나중에 다른 글로 전해보고자 한다.
*아이가 새벽2시반에 기침해서 깨서 글 썼어요. 이제 출근하러 가야해요..
포럼의 패널로 함께한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전 영국수상)의 딸 캐롤 대처(저널리스트/방송인)가 인용한 말을 티저처럼 남긴다.
there's no such thing as a writers block, that was invented by California who couldn't write"
-Teddy Pratchette (1948~)
Writer‘s Block이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글을 쓸 줄 모르는 캘리포니아에서 발명된 말 입니다.
-태디 프렛쳇-
** 커버사진 설명 : 2024/07/20 막내 재우러 걷다가 옥상까지 올라가서 찍은 하늘
(1) 기억하고 싶은 것을 붙잡기 위해
외손자가 취직하고 장가가는 것까지 보고 세상을 떠나신 외할머니. 친할머니는 군휴가 때 자주 노력한 게 전부이지만, 외할머니는 장수하셔서 직장인이 된 후, 수년간은 거의 매달, 혹은 격월로 찾아뵀다. (약속이 없는 주말의 일정처럼) 양쪽 조부모님들이 살아계셨을 때는 그 분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장례식과 함께 사라지는 게 아쉽다고 생각되었다. 하나 하나 적고 남기고 싶었지만 그걸 해내진 못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던 예를 들었지만, 오랜 기간동안 '타인의 가치있는 말을 기록하기 위해' 글쓰기를 사용했다. 유명인사의 강연 중, 책의 한 구절, 노래의 한 소절 등.
예전에는 별 거 아닌 것 같은 내 삶을 기록하는 것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보게 되는 아이의 모습, 아이의 말, 아이를 통해 내가 배운 것들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될 소중한 추억이나 감사할 것들. 순간을 잡아 종이에 남기는 거다.
(2) 오해를 풀기 위해
그러다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오해를 보았다.
음모론부터 과도한 단순화와 '귀차니즘'의 영향으로 놓치게 되는 '정확한 정보', 좀 더 멋진 단어를 사용하자면, 진실.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글이 가까워지게 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대부분 직접적 조사하거나 대조/비교검증하는 절차없이 퍼나르기에 바빴고, 자기 주장을 여러 색깔의 말로 표현하기에 바빴다. (개중에는 정말 빨강, 주황 글씨의 볼드체로 쓰시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인터넷이란 세상 속에 균형을 잡는데 기여하는 정보를 '풀어놓고' 싶었다.
종종 오해를 푸는 게 사람들이 마주한 어려움을 돌파하는데 힘이 되기도 하는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출간작가가 되고 싶어서' 라는 이유는 없는데, 그걸 목표로 삼으면 글쓰기가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출간작가가 되면 '잘 팔리는 작가'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길 거고, 그제서야 '작가로서의 성공'이란 목표가 또 생기고, 그건 즐거운 글쓰기가 될 지 (아직) 모르겠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주위에서 (혹은 출판계의 누군가가)
'너 작가가 되라'
'너 책을 써라'
라고 떠밀려서 작가가 되는 걸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려면 엄청난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도 자각하고 있다.
그 때까지는 즐거운 글쓰기를 하며 의미있는 글을 만들어내는 게 목표이다.
그 과중에 얻게 되는 선물들.
그 '동료'들은 '작가'라는 명칭이 이름 뒤에 붙는 다양한 사람들이 될 것 같다.